[매일일보] 북한이 8일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2인자’ 장성택을 숙청하면서 밝힌 그의 ‘죄목’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당·반혁명 종파행위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장성택이 “최고사령관(김정은) 명령에 불복함으로써 당의 유일적영도체계 확립을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반당 종파분자’, ‘수령의 명령 불복’, 심지어 ‘간첩’ 등의 딱지를 붙여 1인 지배체제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을 숙청하는 것은 북한 김씨 세습체제의 전통이다.
일성, 수차례 ‘전쟁’으로 모두 숙청
북한 정권의 ‘시조’인 김일성 주석은 1인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 정치적 경쟁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해방 직후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조선공산당을 설립한 김 주석은 1949년 6월 중국에서 활동했던 ‘연안파’ 중심의 조선신민당, 남로당 등을 통합해 조선노동당을 창설하고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노동당의 1인자가 됐지만, 지지기반이 약했던 김 주석은 1인 지배체제 확립에 반대하는 각 계파를 단번에 숙청하지 않고 하나씩 제거했다. 김 주석은 우선 6·25 남침 실패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1955년까지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 간부들을 ‘미제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남로당 계열 제거에 앞장섰던 인물은 ‘소련파’ 박창옥 전 내각 부수상이다. 그는 김 주석을 위해 같은 계파인 허가이 숙청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박창옥은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파와 손잡고 김 주석의 독주에 정면으로 도전하다가 ‘반당 종파분자’로 낙인찍혀 ‘토사구팽’ 당했다.
이후 김 주석은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를 계기로 연안파와 소련파는 물론 오기섭 등 국내파까지 모조리 제거했다.
1960년대 들어 노동당 내에는 김 주석의 친위부대인 ‘빨치산파’와 ‘갑산파’만이 남게 됐다. 당시 노동당 내 2인자였던 박금철과 리효순 등 갑산파는 김 주석과 연계해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인물들이지만 자기 세력을 확장하려다 종파분자로 몰려 1967년 숙청됐다.
갑산파 숙청을 끝으로 노동당 내에서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한 김 주석은 1969년에는 김창봉 민족보위상(국방장관에 해당), 허봉학 군 총정치국장 등 군부의 실세들을 ‘수령의 권위 도전’과 ‘군벌주의’라는 죄목으로 제거했다.
정일, ‘간첩단 사건’까지 조작
1970년대 들어 1인 지배체제를 확고히 한 김 주석은 아들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권력을 차례차례 넘겨줬다. 김 위원장은 당시 김 주석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자신의 삼촌 김영주 전 노동당 조직비서는 물론 최대 정적이었던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김평일 등과의 ‘충성경쟁’에서 승리하면서 김 주석으로부터 후계자로 낙점 받았다.
결국 김 위원장은 1973년 9월 30대 초반의 나이에 노동당 조직 및 선전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에 오르면서 당권을 장악했으며 이듬해 2월 당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는 김 위원장을 후계자로 추대하는 ‘결정서’가 채택됐다.
특히 김평일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계모 김성애와 그 자녀를 ‘곁가지’로 규정하고 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광범위한 숙청작업을 단행했다. 김성애와 그 자녀와 세력에 대한 제거는 김정일 일인지배 체제에서 단행한 최대 숙청작업이었다.
또 김 위원장은 자신의 경쟁자였던 김영주를 자강도로 추방했으며 김영주를 추종했던 김동규 전 부주석과 류장식 전 대남비서 등을 숙청했다.
김정일 체제에서 이뤄진 두 번째 숙청작업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 후 1997년께 사회안전부 정치국장 채문덕을 내세워 ‘심화조사건’이라는 대형 간첩단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수많은 아사자를 낳은 ‘고난의 행군’으로 민심이 흔들리고 사회 전반에 불안정이 초래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차원의 숙청작업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관히 전 노동당 농업담당비서, 서윤석 전 평양시당 책임비서와 문성술 본부당 책임비서, 김만금 전 부주석 등 김일성 시대의 인물들에게 무더기로 ‘간첩’ 누명이 씌워졌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김 위원장은 심화조사건 총책이었던 채문덕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고 심화조사건 피해자들을 복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