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했으며 아직까지 법관들이 ‘가장 존경하는 법관’으로 꼽는 가인(街人) 김병로(1887.12.15~1964.1.13) 선생이 13일로 서거 50주기를 맞았다.
아호인 가인은 ‘거리의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거처할 곳이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독립을 염원하던 김병로 선생 본인이 직접 붙인 것이다.
김병로는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면서 이인·허헌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명망을 날렸으며 이승만정부 시기 대법원장으로서 사법독립의 기틀을 쌓은 인물로 평가된다.
김병로는 대한광복단을 결성하고 일제 독립운동 탄압의 본거지였던 서울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김상옥 의사 관련 인물들에 대한 형사재판 공판에서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조선인 전체가 가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정치 변혁을 도모했다고 하여 처벌한다면 양민을 억지로 법의 그물에다가 잡아넣는 것”이라고 일갈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광복 직후 보수우파세력이 집결한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정책노선에 반발해 탈당하고 이후 좌우합작위원회와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한 김병로는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과 초대 대법원장을 맡아 9년 3개월간 재임했다.
대법원장 재임 동안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진 김병로는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는 이승만 정권과 심심찮게 대립각을 세웠는데, 대표적인 것이 1950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 판결이다.
법원은 ‘프락치’로 지목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징역 3~10년의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이 판결과 안호상 전 문교부장관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윤재구 의원의 횡령 사건에 대한 잇따른 무죄 선고는 이승만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라고 강조한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1950년 2월 왼쪽다리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은 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사표를 종용받았지만 이를 거부하며 의족을 짚고 등원할 만큼 사법 독립을 지키기 위해 온 몸을 던졌다. 이와 관련 한 대법관 출신 인사는 의족에 의지한 김병로에 대해 “지팡이를 짚고 한쪽으로 기운 그의 모습은 병들기 시작한 사법부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국회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의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고 사법부를 비판하자 김병로 대법원장이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라”라며 맞대응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서민호 의원이 자신을 살해하려던 육군 대위를 권총으로 사살해 기소된 사건에서 1심은 정당방위를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것에 대해 이 대통령이 “도대체 그런 재판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지만 김 대법원장은 “판사가 내린 판결은 대법원장인 나도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무죄 판결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절차를 밟아 상소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받아 넘겼다.
법관들에게 항상 청렴을 강조했던 김병로는 사법부의 ‘큰 어른’으로서도 숱한 일화를 남겼다. 박봉에 시달리던 시골 판사가 사표를 들고 찾아오자 “나도 죽을 먹으며 산다. 함께 참고 고생해 보자”고 만류했고, 판사 회의에서는 “사법관들은 오직 정의의 변호자가 됨으로써 사법의 권위를 세우는데 휴식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탄압에 사용됐던 치안유지법을 그대로 베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형법을 통해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또한 경찰관직무집행법과 관련해서도 “국민은 악법의 폐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면서 “이와 같은 법률이 헌법이나 형사소송법 기타 모든 법률에 우월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오인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민법을 제정할 때에는 일본 민법을 대체하는 독립적인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형법에서는 ‘실질적 위법성’을 따질 때 우리 형법에만 있는 고유한 표현인 ‘사회상규(社會常規)’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워 법조문에 담았다.
문필가 故이은상 선생은 김병로의 비문에 ‘민족의 울분을 참지 못해 사회 투쟁을 결심했고, 눈물겨운 변론으로 피를 끓이며 독립투사 구출에 있는 힘을 다하고, 민족정기 앙양과 인권 옹호를 위하여는 언제나 선봉이 됐다’고 썼다.
한편 대법원은 김병로 선생 서거 50주기를 맞아 그의 다양한 면모와 업적을 조명하기 위해 추념식, 학술심포지엄, 특별전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앞서 10일에는 사법발전재단과 함께 ‘정의를 바로세운 우리나라 첫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라는 제목으로 어린이를 위한 만화위인전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