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국어사전에서 맛볼 수 없는 풍부한 언어의 바다" 『조선어사전』 초판본 86년만에 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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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국어사전에서 맛볼 수 없는 풍부한 언어의 바다" 『조선어사전』 초판본 86년만에 복간
  • 김종혁 기자
  • 승인 2024.02.28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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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5주년 맞아 … ‘최초의 국어사전’ 원형 그대로 재현

매일일보 = 김종혁 기자  |  3·1운동 105주년을 맞아 <조선어사전>이 복간된다. 초판 발간 후 86년만이다. <조선어사전>은 우리말로 된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청람 문세영이 편찬해 1938년 발간됐다.

어휘를 모으고 풀이한 사전이기 전에 우리말이 나라말이 될 수 없던 시기에 우리 언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선언이기도 했다. 일제의 무단통치로 우리 문화가 사그라들던 시기에 우리말이 생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한 위대한 저술로 최현배의 『우리말본』(1937), 김윤경의 『조선문자급어학사』(1938)와 함께 일제강점기 우리말 관련 3대 저술로 꼽힌다.

조선어사전/ 1938년 문세영 지음/ 148*217mm/ 1696쪽/ 5만1100원/ 지식공작소 펴냄<br>
조선어사전/ 1938년 문세영 지음/ 148*217mm/ 1696쪽/ 5만1100원/ 지식공작소 펴냄

조선어학회가 1933년에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의해 표기한 최초의 사전이기도 해 당시의 표준어 보급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학술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현재 온전한 실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식공작소(대표 박영률)는 “최초의 국어사전이 박물관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영인본으로 복간하게 됐다”며 “국립한글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소장본과 비교·대조하여 원형과 최대한 동일하게 재현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복간된 <조선어사전> 영인본은 한글학회 『우리말 큰사전』 수석 편찬원을 지낸 조재수 국어학자가 소장한 초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활자체와 4단 세로쓰기 양식은 물론 활판 인쇄 기술의 한계로 발생한 오류를 인위적으로 수정하지 않고 표지부터 본문까지 원본의 물성을 최대한 동일하게 재현해 첫 출간 당시의 시대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책을 찍는 방식은 낱낱의 활자로 판을 짜고 먹을 칠해서 종이에 찍는 연판 인쇄 방식이었기 때문에 책이 잘못 인쇄되는 경우가 흔했다.

<조선어사전>은 초판본 8만여 어휘, 수정증보판(1940년 발간)은 9만여 어휘의 올림말이 실린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4만여 어휘가 실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말모이’나 6만가량의 어휘가 실린 조선총독부 사전을 능가한다. 표준말 외에도 방언, 옛말, 이두, 학술어, 속담, 관용구 등 다양한 우리말을 수록하고 있어 당대의 언어생활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과 문화를 두루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모던껄’, ‘모던뽀이’ 등 근래의 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은 신어가 실린 사례, ‘러버(Lover)’의 뜻풀이로 ‘마음 속에 있는 사람. 戀人(연인)’을 제시하고 있으면서 정작 ‘연인’은 올림말로 등재되지 않은 사례 등은 서구 문물이 유입되던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월탄 박종화는 ≪신천지≫ 1954년 9월호에서 현진건이 “『조선어사전』이 처음 나오자 고어와 신어를 비교하면서 문장에 써먹을 어휘를 수십 독을 하였다”고 밝혔다. 해방 이전 유일한 우리말 사전으로서 『조선어사전』이 지닌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1원이 넘는 책이 드물던 때에 7원에 달하는 값비싼 책이었음에도 초판 1000부, 재판 2000부가 매진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품은 우리말 사전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 준다.

단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변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때문에 현대의 국어사전을 통해 과거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시차뿐 아니라 오해도 동반하는 일이다. 하지만 <조선어사전>은 20세기 초 조선을 들여다보려는 이들에게 올바른 렌즈가 되어 준다.

이 책을 통해 연구자는 당시의 생생한 풍경을, 문학 독자는 작가가 의도한 의미를, 창작자는 현대의 국어사전에서는 맛볼 수 없는 풍부한 언어의 바다를 지금 여기에 불러올 수 있다.

  • 문세영은 누구인가
  • 훈민정음 반포 500년 만에 첫 우리말사전 편찬한 교육자

 

청람(靑嵐) 문세영(文世榮)은 1895년(고종 32년) 태어나 서울 종로구 누상동에서 살았다.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 돼 사망연도는 알 수 없다.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1917년 일본 동양대학 윤리교육과에 입학했다.

문세영이 우리말 사전을 처음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대학 1학년 때다. 함께 하숙하던 중국인 유학생이 조선어로 된 사전이 있냐고 물었는데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우리말 사전이 없었다. 문세영은 사전도 없는 민족이라는 수치심에 우리말 어휘를 모으기 시작했다.

귀국 후 근화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일본어 대역사전으로 학생들을 가르쳐야만 하는 현실을 마주한 문세영은 1928년에 교직마저 그만두고 재산을 탕진하며 사전 편찬에만 몰두했다. 문세영은 조선어학회 이윤재와 6교, 7교까지 교정을 보고 이미 조판된 어휘라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면 뜯어서 새 낱말을 끼워 넣을 정도로 마지막까지 열성이었다.

두 평 남짓 방 한 칸에서 왼쪽 다리에 마비가 올 때까지 하루 네다섯 시간만 자면서 1936년 원고를 완성한다. 출판 자금이 없어 전국을 수소문하던 문세영은 서점이자 출판사였던 박문서관의 주인 노익형의 지원으로 1938년 7월 10일 마침내 『조선어사전』을 세상에 선보인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약 500년 만이다.

1940년에는 전국 독자들의 도움으로 방언과 학술어 등 1만여 어휘를 보탠 『수정증보 조선어사전』을 영창서관에서 발행한다. 이후에도 『중등조선어사전』(1947), 『국어사전』(1949), 『우리말사전』(1950), 『순전한 우리말사전』(1951), 『표준가나다사전』(1953), 『최신판 표준국어사전』(1954) 등 다양한 사전을 펴내며 문세영 사전은 1957년 한글학회의 『큰사전』이 완간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전으로 자리매김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학회 표준말 수정위원을 지냈다. 일본 유학 때 동경 유학생으로 조직된 문원사(文園社)에서 방정환 등과 민족 각성을 위해 활동하기도 했다.

6·25 때 문세영이 북으로 건너가면서 행방불명되고 1957년에 한글학회 이희승이 ‘문세영이 이윤재의 사전 원고를 도용했다’고 비판하면서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은 점점 잊히기 시작했다. 이후 이희승의 비판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한글학회 조재수 위원, 민족문제연구소 박용규 위원으로부터 문세영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조선어사전』은 문세영이 민족적 과업을 이루기 위해 개인적 삶을 바쳐 편찬한 것으로 “현대 국어사전의 기틀이 된 기념비적인 사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를 깁고 더한 『수정증보 조선어사전』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최근 국립국어원의 ‘근현대 국어사전’ 서비스 활용 자료로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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