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이용 기자 |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샘 레이미 감독, 토비 맥과이어 주연의 미국 영화 스파이더맨에 등장하는 대사다. 큰 힘을 갖고 방황하는 주인공 피터에게 삼촌 벤이 충고하며 건넨 말로, 향후 모든 히어로 장르 전체를 관통하는 '명대사'가 됐다.
본래 피터는 우연한 계기로 강력한 힘을 얻고, 자신을 괴롭히던 학교 깡패들을 혼내주거나, 푼돈을 버는데 사용했다. 그러다 자신의 실수로 삼촌이 사망한 이후, 힘에 대한 책임감을 깨닫고 약자를 돕는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났다. 영웅으로 활동하며 친구와 연인을 잃고, 마땅한 직업도 얻지 못했지만 끝내 스파이더맨의 신념만은 잃지 않았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조시 트랭크 감독, 데인 드한 주연의 영화 ‘크로니클’은 초능력을 얻게 된 10대 청소년들의 비극을 담았다. 주인공 앤드류는 모처럼 얻은 초능력을 친구들과 소소한 장난을 치는데 쓴다. 그러나 평소 가정·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앤드류가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경찰은 물론 같은 초능력자들마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공권력조차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가졌단 점에서, 이번 의사들의 집단행동과 비교해보게 된다. 정부는 의료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에게 법적 처분하겠다며, 현장 복귀를 명령했다. 그러나 갖은 요청에도 돌아온 의사는 거의 없었고, 의료공백은 현실화 됐다.
결국 이는 국내 의료 체계상 의사의 권한이 워낙 막강했던 탓이라 볼 수 있다. 마치 앤드류가 경찰 기동대의 화력 따윈 가뿐히 무시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에, 통제되지 않았던 것처럼. 법적으로 의사의 처방과 지도 감독 없이 치료를 진행하는 행동은 엄연히 불법이다. 처방 치료 독점권을 가진 의사가 일을 놓아버리면, 대체제가 없다.
물론 의사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증원을 추진하는 정부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정부는 의사들에게 면허 취소를 운운하며 맞불을 놓고 있다. 만약 이들이 정말로 면허를 박탈 당하면, 당장의 의료공백은 해결할 방법은 있는지 의문이다. 강대강 전략은 오히려 앤드류를 자극해 도시를 더 박살낼 계기만 주는 꼴이다.
이 가운데 의료 현장에 남아 환자를 돌보는, 그야말로 영웅이라 불릴만한 의사들이 있다. 일부 의사는 현장에 복귀하거나 남은 전공의들을 색출해 명단을 만들고, 조롱하는 등 도를 넘은 움직임도 보였다. 영웅임에도 범법자란 오명을 쓴 스파이더맨처럼, 이 ‘진정한 의사’들은 대접 받긴 커녕 동료에게 비난 받고, 열악한 근무 환경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이들은 오로지 환자를 위하겠다는 의사의 사명감으로 현장에 남은 것이기에, 국민들이 앞장서서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의사가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타고난 두뇌도 중요하지만 높은 교육비와 꾸준한 학업성적, 이런 조건을 갖추고 10년 이상 노력해야 이룰 수 있다. 거대한 힘을 갖기에 충분한 자격을 증명한 셈이다. 다만 이 힘으로 영웅이 될지, ‘그냥 의사’가 될진 오로지 본인에게 달려 있다.
이제 국민들도 안다. 누가 ‘스파이더맨의 피터’고, 누가 ‘크로니클의 앤드류’인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의 의료 시스템을 정비하고, 의료 현장에서 환자를 지킨 의사들을 영웅으로 맞이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