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우리나라 국회의원 총선거는 최다득표자 1명만이 당선되는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유권자의 다수인 50%를 초과하는 형태인 과반수도 아니고 차점자보다 1표라도 더 많으면 당선이 되는 구조이다. 한편 지방선거 중 기초의원 선거의 경우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2~3명의 상위 당선자를 배출하는 중대선거구 구조이다. 이 경우에는 많게는 90% 이상, 적게는 60% 이상 민의를 대변할 수 있다. 다만, 소선거제와 중대선거제 중 어떤 것이 더 옳다는 것이 명확하게 우리 정치공동체에서 평가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체제는 고대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흔히 민주정이라고 평가되는 그리스 아고라 정치도 실상은 여성은 물론 노예와 아동은 참여할 수 없는 형태의 제한된 참여 정치형태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을 채택한 현대 민주주의에선 선거제도를 바탕으로 대의민주주의가 국민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양 논리를 전개해왔다. 그럼에도 경제적 여유와 노동에 대한 해방 그리고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국민주권, 더 나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이 매일 새롭게 제안되고 있다. 체육관 선거에서 벗어나, 직접·보통선거가 민주주의 실현의 거의 유일한 도구이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방법이 다양해졌다. 여러 주제로 촛불집회는 물론이고, 학교 반장선거를 할때에도 거수투표가 아닌 비밀투표가 당연해졌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민주주의 교육에서도 의사결정의 방법을 다수결 투표를 당연한 것으로, 반장이 혼자 결정하는 것을 비민주적인 것으로 여기곤 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주권상실과 이승만 독재, 군부독재를 겪으며 독재자에 대한 시민적 저항이 헌법 전문에도 자리하며, 우리 정치공동체에도 뿌리깊게 스며들었지만, 나치즘과 같은 다수에 의한 독재는 다소 무심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투표로 당선된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는 민주적이지 않다. 민주주의의 개념이 공동체가 공동체의 주인이 되는 정치적 구호라는 관점에서 이제 확장시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선거로 선출된 권력에 대한 민주적 주권행사도 성취를 보였지만, 고도의 반헌법적 위법사실을 바탕으로 사법판단이 필요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불법적이지는 않지만, 반민주적인 행위에 대한 정치적 의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주권자의 의사를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생기기 전에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바로 토론공동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을 말하면,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공동체가 공동체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시도를 위한 정치적 구호인 것이다. 타인을 통한 정치적 의사형성은 왜곡되기 쉽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대표로 뽑아 대신하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과정마저도 권리라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독재가 타인에 의한 지배를 받는 것이라 본다면 자신이 선택한 후보를 당선시키지 못한 사람들은 다수에 의한 독재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확장될 수도 있다. 정치공동체, 토론공동체가 필요하다.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