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이태훈 기자 |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원 구성 협상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가 의원들을 성화(成火)로 닷새 만에 돌아왔다. 추 원내대표는 지난 1일 복귀 후 가진 첫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배수진을 치고 108명 의원 전체가 똘똘 뭉쳐 더불어민주당의 의회독재에 맞서 가열차게 싸우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채상병 특검법' 통과를 막기 위해 2년 3개월여 만에 벌어진 이번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는 거대 야당에 맞서는 소수 여당의 결기를 보여줄 절호의 무대였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나태'와 '안일' 그 자체였다. 일부 국민의힘 의원은 필리버스터 첫 주자로 나선 자당 유상범 의원이 몇 마디 뱉기도 전에 '꿀잠'을 자는 모습을 보이며 거센 질타를 받았다. 이에 대해 조국혁신당은 "꾸벅꾸벅 조는 게 아니라 아주 편안하게 잔다"며 "잠은 집에 가서 주무시라. 보는 국민들 부아만 치민다"는 조롱에 가까운 논평을 냈다.
게다가 필리버스터 발언자로 연단에 선 의원들이 민주당 인사들과 설전을 벌여가며 채상병 특검법의 부당성을 주장할 때, 본회의장을 지킨 국민의힘 의원들은 10여명 안팎에 불과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지지자들조차 "할 말이 없다"는 반응을 내놓았으니, 일반 국민들이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를 진정성 있게 보았을 리 만무하다.
이런 와중에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채상병 특검법 표결 순간 본회의장에 남아 '찬성표'를 던지며 여당의 단일대오에 큰 생채기를 냈다.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라는 최후의 수단까지 써가며 채상병 특검법 저지에 총력을 쏟았지만, 안 의원의 찬성표로 "자기편도 설득하지 못하는 논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안 의원의 '대오 이탈'에 일부 국민의힘 의원은 안 의원에 대한 '조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여당이 주도한 필리버스터 정국은 마지막까지 아름답지도, 단단하지도 못했다.
그나마 국민의힘이 이번 필리버스터로 얻은 한 가지 수확이 있다면, 몇몇 초선 의원들이 보여준 결기다. 특히 박준태 의원은 4일 오전 2시30분께 발언자로 나서 6시간50분을 버티는 처절함을 보여줬다. 이번 필리버스터 최장시간 발언자였다. 추 원내대표는 지친 기색으로 연단에서 내려온 박 의원을 꼭 안아줬다. 당이 이번 필리버스터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한 상황에서, 여러 의미가 담긴 포옹이었을 것이다.
더 거세질 거야의 입법 드라이브에 대응하기 위해선 이런 오합지졸식의 단일대오론 곤란하다. 의원들의 각성을 이끌어야 하는 추 원내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지도부의 비책이 필요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