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를 손님으로 착각한 그들은 유혹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성구매자들 확보에 팔을 걷어 부치던 예전의 활기는 느낄 수 없었다. 기자 이외에 이곳을 찾은 남성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적막만이 가득했다.
지난 달 23일로 성매매특별법(이하 성특법)이 제정된 지 2주년이 됐다. 이 법 시행으로 성매매는 불법이 됐고 성구매를 한 남성에 대해서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게끔 처벌이 강화됐다.
성특법의 성과는 표면적으로 대단했다. 서울의 대표 사창가인 미아리 텍사스촌을 비롯, 청량리 588, 경기도 파주의 용주골, 경기도 평택의 삼리 등 대부분의 집창촌들이 문을 닫았다.
이곳 학익동 사창가 역시, 대부분의 업소가 비어있었다. 2000년 성특법이 발효되기 전 이곳엔 150여개의 성매매 업소가 들어서 있었다. 성매매 여성만도 2000명에 달했다고 이 지역 관할 파출소 관계자는 전했다.
현재 남은 성매매 업소는 12개 내외. 무려 130여 개의 업소가 문을 닫은 셈이다. 예전의 명성이 무색하게 50여명의 성매매 여성들만이 남성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부 학동 지구대 김갑재 팀장은 “성특법 시행 후 대부분의 (학익동 집창촌의)성매매 여성들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며 “현재 남은 업소들도 오는 10월 말 재개발 공사에 들어간다. 남은 성매매 여성들 역시 곧 이곳을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사라지는 집창촌. 그리고 이곳을 떠나는 성매매 여성들. 그럼 이들은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갔을까. 정부의 바람대로 자활을 거쳐 사회가 인정하는 일반인이 되는 것일까.
없어지는 ‘집창촌’, 늘어나는 ‘대딸방’
지난 달 27일, 흔히 ‘대딸방’이라고 불리는 서울 마포구의 한 변종 성매매업소에서 김 모(26)양을 만났다. 이곳에서 두 달 째 일하고 있는 김 양은 미아리 텍사스촌 출신이다.
미아리 집창촌이 없어지고 난 후 그녀는 여러 성매매 업소를 거쳐 지난 8월, 이곳에 이르렀다. 김 양은 정부의 집중 단속으로 상당수 집창촌은 사라졌지만 성매매 여성들은 유사성행위 업소로 장소를 옮길 뿐이라고 설명한다.
지난 2000년 서울의 모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성매매를 시작했다고 밝힌 김 양. 그녀가 성매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김 양은 “고등학교 졸업 후 솔직히 공장에서 일도 해봤다. 월급도 받아 봤다. 하지만 어려운 살림에 그리 도움이 되진 않았다”며 “그래서 찾은 것이 성매매였다. 남들이 쓰레기니 하류니 취급해도 직업으로 생각했다. 돈을 벌고 싶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하지만 성특법 시행이후 쉽게 말해 내 직업이 정부로부터 인정을 못 받게 됐다. 먹고 살 길을 끊어 놓은 것이다”라며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라고 하소연했다.
‘다른 직업을 가져 볼 생각은 안 해봤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양은 “기자에게 갑자기 정부가 ‘하던 일 그만두고 미용사해라’하면 기자는 미용사 하겠느냐”며 “할 줄 아는 일이 이것 밖에 없고 이제 와서 다른 일거리를 찾는 것도 무리가 있다”라고 항변했다.
기자가 성매매여성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시도한 결과 해당 성매매 여성의 약 70%가량이 김 양과 마찬가지로 성매매를 계속하길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날 종로의 한 안마시술소에서 만난 성매매 여성 박 모(29)양 역시 “지금 와서 인정할 수 없으니 다른 일거리를 찾으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며 “새로운 직업을 갖는 건 둘째 치고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불법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기자에게 울분을 토했다.
그녀는 또한 성특법 시행이후 오히려 ‘변태적’ 성문화가 늘고 있음을 지적했다. 집창촌에 있던 대다수의 여성들이 법망을 피해 음지로 숨어들면서 성문화가 법 시행 전보다 퇴폐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박 양은 “내가 알고 있는 성매매 여성 중 성특법 시행 후 직업을 바꾼 사람은 한명도 없다”며 “오히려 법망을 피해 대딸방, 하드코어룸살롱 같은 변태 업소로 직장을 바꿨다”고 말했다.
성매매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음을 밝히고 있는 일부 성매매여성들. 그들은 여러 업소들을 전전하며 성매매를 계속하고 있다. 이 여성들은 성매매가 자신들의 직업이고 이를 정부가 인정해주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성매매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매춘여성이 아닌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회인으로의 삶을 원하고 있다.
한 달에 42만원... 다시 시작된 매춘
같은 달 29일 현재 성매매를 하고 있는 임 모(27)양을 만났다. 그녀는 성매매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서울의 한 탈성매매여성 자활센터에서 새 삶을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정부가 지원하는 적은 지원금은 그녀의 꿈을 도와줄 수 없었다.
지난 2004년 말, 임 양은 성특법이 시행된 후 미아리 텍사스촌을 나와 자발적으로 자활센터를 찾았다.
당시 그녀는 임신중절과 각종 성병을 안고 사는 집창촌 생활이 싫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성매매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성특법이 고마웠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자활센터를 나와 ‘전화방’을 통해 성매매를 하고 있다. 어렵게 빠져나온 성매매의 덫에 다시 걸려든 임 양. 그녀가 원치 않는 과거로 돌아간 이유는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으로는 생활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정부가 재활의지 있는 성매매여성에게 지급하는 금액은 한 달에 42만원. 서울 신림동에서 월세를 살고 있는 임 양은 방세 35만원을 내고 나면 남는 7만원으로 한 달을 생활해야 했다.
임 양은 한숨 쉬며 “새로운 직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무직상태에서 42만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건데 그게 말이 되냐”며 “공과금에 식비에...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성매매를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의 변화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정부의 소극적인 지원만이 아니다. 사회적 편견도 한 몫하고 있다.
인천의 한 자활센터에서 만난 박 모(23)양. 전문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지난 5월 자활센터의 추천으로 인천의 모 중소업체 경리로 입사할 수 있었다.
성매매에서 벗어나 사회로의 첫발을 내딛은 박 양. 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동료들의 멸시뿐이었다.
그녀의 과거를 우연히 알게 된 동료들은 그녀와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동료들끼리 모여 ‘창녀라더라’, ‘질 떨어지게 여긴 왜 온거냐’라는 등, 험담을 일삼았다고 박 양은 전했다.
박 양은 모욕을 받더라도 새 삶을 찾고 싶었다. 꾹 참고 인정받으려 노력했다. 퇴근 후 집에 가면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직장 상사까지 가세했다. ‘천하게도 생겼다’, ‘흥분돼 일이나 하겠어’ 등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박 양은 2달도 채 안된 지난 6월 중순에 회사를 그만뒀다.
박 양은 “성매매 여성이 남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은 겪어 봐서 잘 알고 있다”며 “(사회는)벗어나라고 말로만 떠들고 이렇게 멸시하는데... 우린 어떡하란 건가”라고 흐느꼈다.
성특법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났다. 표면적으로 집창촌은 사라져가고 성매매여성들도 사라져 간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녀들은 아직도 성매매를 하고 있고 오히려 음지에서 활동 영역을 더 넓혀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달 20일 민주성노동자연대가 발표한 성명은 ‘성매매 여성 대다수가 집창촌을 떠나 위험이 가득한 시장으로 진출’했고 ‘집창촌에 남은 일부 성매매여성은 굶주림에 직면’해 있다고 성매매 여성의 현 실태를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