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인레스와 전선 분야를 주력으로 하는 대한전선이 사업 다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3일 업계에 따르면 대한전선은 필리핀 세부 막탄에 조성되는 대규모 리조트 단지 '세부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리조트' 개발에 투자자로 나서기로 했다.
대한전선이 해외 리조트 사업에 투자하기는 이번이 처음. 구체적 투자금액은 이 사업의 현지 법인인 필리핀 BXT코퍼레이션과 조율중이지만, 총 투자금액 200억원 가운데 40%인 80억원 정도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세부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리조트는 지상15층, 지하 1층 규모로 내년 10월 완공될 예정. 운영은 국내 호텔업체인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구 아미가 호텔)이 담당한다. 대한전선 측은 이번 리조트 개발 참여에 대해 "투자수익 확보차원의 사업"이라며 "단순한 지분 투자"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전선 알부자'인 대한전선이 지난 2002년부터 유독 레저 사업을 확대하는 이유와 향후 행보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02년 무주리조트 인수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레저, 관광 사업에 뛰어든 대한전선은 현재 무주기업도시 건설을 위해 오는 2015년까지 총 1조5천억원을 투자하는 등 레저 분야를 그룹의 미래 핵심사업으로 키우고 있다.
총 자산 3조2천500억원으로 재계 48위인 대한전선그룹은 1950년대에는 재계 다섯 손가락 안에 들만큼 화려한 위세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후 대한방직그룹과 대한제당그룹으로 분리됐고, 1980년대를 거치면서 가전 등 일부 사업군을 매각, 그 규모가 상당 부문 축소됐지만 여전히 그 저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규모에 걸맞지 않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사실.
대중들에게는 낯설은 '전선' 분야의 사업 때문이기도 하지만 재계에서도 유독 보수 색깔이 강한 기업이라는 이유도 있다. 그런 대한전선이 요 몇 년 사이 유독 세간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데,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기존과는 전혀 다른 분야로의 사업 확장 때문이다.
대한전선은 지난 80년대부터 전선제품의 해외시장을 지속적으로 공략해 수출 비중을 늘려왔다. 97년 초 외환위기로 환율이 치솟았을 당시 수출대금으로 들어온 달러로 인해 대한전선은 엄청난 자금을 보유하게 됐다. 이 돈으로 국가 발행 채권을 매입하고 고금리 예금으로 현금을 묻어둔 것.
지금도 대한전선은 내부 유보금이 8천억원에 달할 만큼 현금동원력이 뛰어나고, 회사 신용이 좋은 만큼 언제든지 2조원 가량의 돈을 동원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바로 이런 자금을 바탕으로 대한전선은 부동산, 주식, 채권에 이르기까지 다 방면에 투자를 해왔다.
과거 진로 정리채권 투자에 2천729억원을 투자, 3천억원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고, 양재동 남부터미널을 1천148억원에 처분해 350억원 가량의 처분 이익을 거두기도 했다.
대한전선 '한 우물만 파는 것 정답 아냐?'
그런가하면 지난 2002에는 1천500억원을 들여 무주리조트를 사들였다. 또 지난 3월에는 전북 고창 소재의 선운레이크밸리 골프장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홈네트워크 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대한위즈홈을 설립했고, 대한테크렌(태양광발전시스템 사업)과 TMC(선박용전선 사업)등을 줄줄이 세웠다. 여기에 렌털업에 진출하기 위해 한국렌탈까지 인수했다.
특히 지난해 창립 50주년을 맞아 레저, 관광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 무주관광레저형 기업도시 추진 기업으로 선정됐다. 무주관광레저형 기업도시는 10년 동안 총 1조5천억원이 투자될 대규모 사업으로 대한전선 측에서는 이를 통해 그룹의 성장잠재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이처럼 대한전선이 레저 사업에 승부수를 띄우는 것은 주력 사업인 전선 분야가 성장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대한전선 임종욱 사장은 지난해 창립기념 간담회에서 "50년 동안 흑자를 내오던 전선 사업의 성장 동력이 고갈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전선 사업을 근간으로 하되, 수익성이 있고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의 기업이라면 국적에 상관없이 M&A를 추진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임 사장은 또 "한 우물을 파라는 학자들의 얘기는 기업 환경이 바뀌면서 이제 더 이상 정답이 아니다"며 "한 우물만 파다가 망한 기업도 적지 않다"고 언급했다.
임종욱 사장 체제 확고해... 3세 경영 승계 글쎄?
물론 업계에서는 대한전선이 신 성장동력을 찾는 과정에서 그룹의 핵심사업과 동떨어진 사업분야를 지나치게 확대하는 측면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돈이 되겠다 싶은 곳에 투자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과거 많은 대기업들이 그랬듯 자칫 문어발식 확장으로 나가게 될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대한전선은 신 사업 확장 과정에서 핵심역량을 크게 의식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특히 신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임 사장은 대한전선의 주력사업과 동떨어진 분야라 할 지라도 사업성이 진입여부의 평가 잣대라고 판단, 과감하게 수평적 사업다각화에 나서고 있다. 트라이브랜드(구 쌍방울)를 통해 패션업에 진출한 것이나 무주리조트 인수로 레저, 관광 사업에 뛰어든 것 역시 그런 판단에서다. 무주관광레저형 기업도시도 마찬가지.
현재까지는 임 사장의 이런 판단이 대체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지난 2002년 인수 당시 무주리조트 매출액은 440억원이었으나 지난해 680억원으로 올랐고, 2004년에 인수한 트라이브랜즈는 89억원의 영업적자에서 올해 100억원대 영업이익을 바라볼 만큼 실적이 개선되고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임 사장을 중심으로 한 체제가 확고해 질수록 고 설원량 회장의 장남인 설윤석씨로의 후계 승계가 늦춰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설 회장의 별세 후 대한전선의 경영권은 임 사장에게 넘겨졌고, 고 설 회장의 부인인 양귀애 고문은 큰 사안에 대해 사후보고만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전선 3세 경영의 중심이 될 설윤석씨는 지난해 8월 대한전선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스테인리스 사업부 등을 거치며 실무를 익히고 있는 그는 현재 경영전략본부 과장으로 재직 중.
지난해부터 양 고문이 부쩍 대외활동을 넓히며 회사 직원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대한전선의 사업은 임 사장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양 고문이 경영일선에 나서지 않는 한 임 사장 중심 체제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임 사장이 고 설 회장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고, 사장 부임 이후 경영성과 또한 뛰어났기 때문에 단 시일내에 3세 경영 승계가 이루어질 명분은 약하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