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에는 없을 것만 같았던 간첩단 사건이 대선을 1년 여 앞두고 ‘결국’ 터지고 말았다. 386 운동권 출신들이 연루된 간첩단 이야기, 이른바 ‘일심회’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은 ‘6ㆍ15 공동선언 이후 최대간첩사건’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검찰은 지난 10월26일부터 이 사건에 대한 수사에 돌입했고, 약 30여일에 걸친 수사를 통해 일심회 사건의 윤곽을 밝혀냈다. 그러나 큰 그림을 그려낼 것만 같았던 검찰 수사는 종착지를 앞두고 소강상태에 빠졌다. 간첩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의자들은 여전히 묵비권을 행사하며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또 피의자 가족들과 민변,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정치권 일부에서는 “보수세력이 대선을 앞두고 의도적으로 부풀린 공안탄압”이라고 주장하면서 검찰 수사에 제동을 걸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수사를 끝까지 마무리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결과가 주목된다. <매일일보>에서 지금까지 진행된 일심회 사건에 대해 검찰 수사 결과를 토대로 그 전말을 짚어봤다.
핵심인물 장민호, 북한에 “돈 달라”
우선 일심회 사건의 열쇠를 쥔 장민호씨.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재미교포로 모 정보통신업체의 사장이었다. 일심회 조직의 총책으로 불리는 그는 북한의 지령을 접수하고 조직원으로부터 수집된 남측의 정보를 북에 보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 1989년 친북교포 김모씨의 소개로 그해 첫 밀입북을 시도한 장씨는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라”라는 북측의 지령을 받고, 몇 년 뒤 귀국해 주한 미군에 입대했다. 그는 용산 등지의 부대에서 근무하며 국내 첩보 활동을 시작했다.
지령전달받고, 전자우편으로 보고하고
장씨의 하부조직원인 이진강(43)씨는 시민단체의 동향을 수집 및 보고하고, 지난해 11월께 일심회 하부 조직인 ‘백두회’를 조직하여 친북세력을 결집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씨는 장씨가 운영하는 회사를 다녔다.장씨의 Y고 고교후배로 알려진 손정목(42)씨는 97년 동문회에서 장씨를 만나 일심회 구성에 참여했다. 손씨는 민노당 중앙당의 내부동향을 파악ㆍ수집하고 조직의 확대를 위해 활동한 것으로 검찰조사 결과 밝혀졌다.또 98년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북한 대외연락부로부터 2000달러를 공작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민주노동당(민노당)의 주요 당직자 신상유출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켰던 최기영(40) 민노당 사무총장은 당의 활동 계획을 수집ㆍ보고하고 당 내 친북세력을 조직한 혐의를 받고 있다. 80년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사무국장 출신이기도 한 그는 주요 당직자 350여명의 신상 정보와 지난 10월 북한을 방문한 민노당 대표단 13명의 성향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밖에 민노당 서울시당의 내부동향 파악을 책임지고 있는 이정훈(43)씨는 민노당 서울시 대의원 중 한명으로 85년 고려대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이씨는 04년 5월 서울시 단위 조직사업으로 ‘선군정치동지회’ 및 ‘8ㆍ25 동지회’의 결성을 선도하고 일심회 하부조직 배치 계획서를 북에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우리 사회 곳곳의 일, 소상히 북에 보고
PC방에서 이메일로 북한과 교신
검찰 조사 결과 장씨는 외국에 서버를 두고 집과 회사, PC방에서 이메일로 북한과 교신했으며 단파 라디오를 통해 북한의 지령을 받기도 했다.암호 해독용 CD로 수신 내용을 풀 지 못할 경우엔 북측에 ‘수신실패’를 보고하고 새 음어표를 다시 제공받았는데 음어표에는 서울은 ‘워싱톤’으로 베이징은 ‘도쿄’로 태국은 ‘멕시코’ 등으로 표기 돼 있었다.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총선거는 ‘이사회’로, 해외 접선은 ‘방문’. 북한 방문은 ‘별장’으로 쓰도록 지시돼 있기도 했다.
공안당국 “6.15 이후 최대 간첩사건”
공안당국은 이번 사건을 ‘6ㆍ15공동선언 이후 최대 간첩사건’으로 규정하고 수사를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중간수사를 마친 공안당국 관계자는 “1차 하부조직원을 이용해 특정 정당과 시민단체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정황을 포착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여당과 청와대 관련된 정보도 있어 수사를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선을 염두에 둔 한나라당은 공안당국의 조사가 철저하게 규명돼지 않는다면 국회 차원의 수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그러나 당사자인 민노당은 지난 10일까지 공식적 사과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해 당원과 네티즌의 비난이 빗발쳤다. 민노당은 곧바로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이해삼)를 구성했는데, 이들은 여전히 “아직까지 관련 물증이 적어 당은 침착하고 냉정하게 현 사태를 대처해 나갈 것”이라며 신중한 반응이다.시민단체도 민노당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는 이번 사건을 ‘대표적인 인권 침해 및 편파 보도 사례’로 지적하고 일부 보수언론와 수구세력들이 시민사회단체와 386 인사들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 공안 정국을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일각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수집 가능한 정보를 국가기밀로 보는 것은 우스운 것이라며 공안기관의 간첩혐의 관련 증거에 비난을 퍼붓고 있다. 또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한 활동가는 “연간 중국을 방문하는 사람이 300만명 넘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하는 사람이 수십만인데, 북한 사람과 만나기만 하면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누구든지 걸릴 수 있다”며 검찰의 일심회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어쨌든 검찰의 수사가 앞으로 진행되면서 일심회가 어떤 식으로 여당과 청와대 인물들과 접촉했고, 또 고급정보의 출처와 수천만 달러의 공작금의 사용처, 여당 및 시민단체의 관련 인물 등 쟁점 사안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날 전망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