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사원 황복사(皇福寺), 웅장한 규모 드러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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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왕실사원 황복사(皇福寺), 웅장한 규모 드러내다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8.01.3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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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석단 건물지 전경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경주 황복사(皇福寺)지에서 신라 왕실사원의 위엄을 보여주는 대석단(大石壇) 기단과 십이지신상(第十二支神像) 기단의 건물지와 회랑(回廊, 지붕이 있는 긴 복도)지가 발견되고, 연못 등에서 금동입불상과 보살입상 7점 등 1,0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삼국유사'에 의하면 황복사(皇福寺)는654년(진덕여왕 8년)에 의상(義湘)대사(625~702)가 29세에 출가한 곳이다. 1942년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 수리할 때 나온 황복사탑 사리함(舍利函)에서 확인된 명문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을 통해 신라 왕실의 종묘적 기능을 한 왕실사원일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당시 삼층석탑의 해체수리 과정에서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호),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호)도 확인돼 주목을 받았다.
12지 건물지 및 방형 연못 내부 출토 금동입불상 및 보살상
문화재청은 전(傳) 황복사지(皇福寺址)의 실체 규명과 유적의 보존정비를 위해 2016년 6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경주시 구황동 100번지 일대의 과수원과 경작지(4,628㎡)를 대상으로 1차 발굴을 진행했다. 그 결과, 효성왕(재위 737~742)을 위한 미완성 왕릉과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 도로 등을 확인했다.2017년 8월부터 시작한 2차 조사에서는 (전)황복사지 삼층석탑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경작지(4,670㎡)를 대상으로 했는데, 조사결과 통일신라 시대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부속 건물지 그리고 회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왕실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의 유구를 발견했다.
조사지역 출토유물
이번 발굴조사에서 왕실사원의 위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지는 대석단 기단 건물지이다. 서쪽의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에 덧붙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남쪽 면에는 돌을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북쪽 면에는 자연석을 쌓아 약 60m에 이르는 대석단을 구축한 후 전면 중앙부 북쪽에 돌계단을 설치했다.
12지 건물지 전경
대석단 기단 건물지는 내부를 회랑을 돌린 독특한 구조로 이는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되지 않은 가람배치 방식이다. 이러한 특징을 통해 특수한 용도의 건물이거나 (전)황복사지의 중심 건물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대석단 건물지 토끼 지신상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는 십이지신상 4구(묘(卯, 토끼), 사(巳, 뱀), 오(午, 말), 미(未, 양))가 조각된 석재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 있으며, 대석단 건물지와 함께 (전)황복사지의 중요 전각지로 보고 있다. 십이지신상은 신라 왕릉에서 확인된 십이지신상 탱석과 비교했을 때 더 발달한 형태를 보이며 김유신묘(사적 제21호)의 십이지신상과 더불어 조각미가 뛰어나다.이 탱석의 도상(圖像)은 김유신묘와 헌덕왕(809~826) 능의 십이지신상보다 앞서며, 제작 연대는 8세기 중후반으로 추정한다. 축조 당시 십이지신상 탱석은 다른 왕릉에서 옮겨와 건물지의 기단석으로 다시 사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편, 출토된 1,000여 점 이상의 유물은 대부분 토기와 기와이다. 대체로 7∼9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장식이 화려한 신장상 화상석, 치미, 기와 등을 통해 당시 격조 높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 등 7점의 불상 유물은 (전)황복사지가 7~10세기까지 신라 왕실사원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사진,자료제공 : 문화재청, 성림문화재단>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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