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달부터 경남 함안군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를 펼쳐 대규모 토목공사로 축조된 토성과 목책(木柵, 울타리) 시설, 건물터,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의 각종 토기 조각들을 찾아내면서 그동안 문헌이나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라가야(阿羅加耶) 왕성의 실체를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7일 밝혔다.그동안 함안군 가야리 일대는 1587년에 제작된 조선 시대 읍지(邑誌) 『함주지(咸州誌)』와 일제강점기의 고적조사보고에서 아라가야의 왕궁지로 추정되어 왔다. 또한, 이곳은 ‘남문외고분군’, ‘선왕고분군’, ‘신읍(臣邑)’ 등 왕궁과 관련된 지명도 아직 남아 있어 아라가야의 왕궁지로 추정됐지만 최근까지 실질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실체를 밝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토성과 목책, 건물터 등 왕성과 관련된 시설을 확인하면서 전성기 아라가야 최고지배층의 실체에 다가가는 성과를 거뒀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토성은 가야권역에서 발견된 동시기 유적과 비교할 때, 그동안 발견된 사례가 없는 축조기법과 규모를 보인다. 흙을 쌓는 과정에서 성벽이 밀리지 않도록 축조 공정마다 나무기둥(목주, 木柱)을 설치했으며, 판축 과정에서 흙을 쌓아 다지는 등 매우 정교한 축조기법을 사용했다. 성벽 상부에는 2열의 나무기둥이 확인되는데, 방어시설인 목책으로 추정된다.토성의 규모는 현재 조사구역(2필지, 약 1,300㎡) 내에 한정 짓는다면, 전체 높이는 8.5m, 상부 폭은 20m~40m 내외이며, 규모로 치면 동시기 가야권역에서는 유례없는 대규모이다.토성 내부에서는 방어시설인 목책과 함께 건물터, 구덩이(수혈, 竪穴) 등이 같이 발견됐다. 건물터는 현재 정확한 형태와 규모를 추정하기 어렵지만, 고상건물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반암(基盤岩)을 인위적으로 파서 조성한 구덩이는 긴네모꼴이며 용도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구덩이 안에서 부뚜막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고, 주로 고분 등 의례 공간에서 나오는 통형기대(筒形器臺, 원통 모양 그릇받침)가 출토돼 특수한 목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파수부완(门柄附盌, 손잡이 달린 완), 붉은색의 연질토기 등이 구덩이에서 나왔는데, 이 유물들은 건물터 내에서도 발견됐다.토기 조각들은 대체로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의 유물들로, 토성의 축조와 사용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시기는 아라가야 세력이 대형 고총고분을 조성하고, 대내외적으로 활발하게 교섭을 전개하였던 전성기에 해당한다.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토성은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정치 권력의 존재를 보여 주는 증거로서, 아라가야가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하였던 정치·경제적 배경을 가늠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본서기' 흠명기 544년과 552년 기록에 등장하는 ‘안라왕(安羅王, 아라가야(安羅)의 임금을 뜻함)’의 실제 거주 공간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아라가야는 문헌 기록으로 볼 때, 가야 전·후기를 거쳐 금관가야, 대가야와 함께 가야의 중심세력을 이루었고, 6세기에는 신라, 백제, 왜와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등 우리 고대사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고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는 이러한 아라가야의 실체를 밝히기에 충분하지 못했다.이번 아라가야 왕성 발굴조사를 계기로 당시의 토목기술과 방어체계, 생활문화 전반에 대한 다양한 고고 자료를 확보하여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아라가야의 전모에 다가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