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김경탁·변주리 기자] ‘권력은 유한하지만 금력은 무한하다’는 속담(?)이 횡행하는 대한민국에서 ‘금력’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져 눈길을 끌고 있다. 이명박정부 출범을 앞두고 벌어졌던 삼성 비자금 특검 수사에서 받은 솜방망이 처벌이 그나마 동계올림픽 유치라는 명분에 의해 ‘단독 사면’이라는 초유의 특혜로 물거품같이 사라진 것은 이미 지난 과거의 일. 정부와 정치권 일반이 합심(?)해 이뤄지고 있는 ‘재계 때리기’에도 끄떡없어보였던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의 아성은 잊혀진 황태자 이맹희씨의 상속권 소송 한 방으로 무너져 내릴 위기에 직면했다
이병철 창업주 유언장에도 안 나온 삼성생명 차명주식
삼남 이건희 ‘독식’ 배경에 상속인들 이면 약속 있었나
상속인들에 보낸 상속재산 소명 자료는 이면합의 자폭
증여세 최대 2조원 이상…범삼성가 추가 소송 가능성도
범삼성가의 맏형이자 ‘비운의 황태자’로 잊혀져 가던 이맹희씨가 지난 14일 동생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상대로 주식인도 청구소송을 제기해 파장이 일고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따르면 이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한 재산을 이 회장이 2008년 말 단독 명의로 변경했다”면서 이 회장을 상대로 삼성생명 주식 824만주와 삼성전자 주식 20주 및 1억원의 지급을 요구했고,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도 삼성생명 주식 100주와 1억원을 청구했다.
이맹희씨가 문제의 재산 존재를 알게 된 계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난해 6월 이건희 회장 측으로부터 날아들어온 ‘상속재산 분할 관련 소명’ 요청 문건이다. 이 문건에는 “故이병철 선대 회장의 삼성그룹 실명주식과 차명주식이 이건희 회장에게 상속됐으니 다른 모든 상속인은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형제의 엇갈린 주장
이번 소송에 대해 삼성그룹 관계자는 “개인적인 민사사건이라 드릴 말씀이 없다”면서도 “이미 오래전에 법률적으로 마무리 됐는데 이제 와서 소송을 제기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CJ그룹(당시 제일제당)이 지난 1994년부터 1997년까지 삼성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를 할 당시 상속 문제가 법적으로 완전히 정리가 됐다는 얘기다. 삼성그룹과 CJ그룹의 계열분리는 호암이 1987년 11월 타계한 후 삼남인 이건희 회장이 후계를 물려받으면서 본격화 됐으며, 장남인 이맹희씨의 아들 이재현 CJ 회장이 1994년 삼성그룹의 모기업 중 하나인 제일제당을 넘겨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반면 이씨는 호암이 상속한 차명재산이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았고, 이를 이 회장이 다른 상속인에게 알리지 않고 이 회장의 명의로 변경했으므로 자신의 상속분만큼 주식과 배당금을 돌려달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씨는 지난해 6월 이 회장이 CJ에 보내온 ‘상속재산 분할 관련 소명’을 통해 차명주식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 2008년 말 삼성그룹에 대한 특검 과정에서 차명계좌가 드러나면서 이 회장이 자신의 명의로 실명전환 한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주식수는 각각 3244만8000주와 224만5525주다. 당시 상속비율과 개정된 민법을 반영한 이씨의 상속비율은 약 25.4%(189분의48)로, 삼성생명 주식 824만주와 삼성전자 57만292주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다.
이씨는 다만 삼성전자 차명주식에 대해서는 “정확한 규모가 파악되지 않는다”며, 이번 소송에서는 이 회장과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각각 20주와 100주만 반환 소송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증여세만 2조원 이상?
이번 갈등의 시작을 불러온 ‘상속재산 분할 관련 소명’ 요청 문건이 나온 이유로 들어가면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커진다. 최악의 경우 이 회장이 증여세만 2조원 이상을 내야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 측이 지난해 6월 이맹희씨 쪽에 관련 문건을 전달해 서명을 요구한 이유는 그해 7월 본격적으로 시작돼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국세청의 삼성전자 심층 세무조사 대응에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세무조사는 당초 그해 2월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평창동계올림픽 유치활동을 이유로 계속 미뤄져 7월26일이 되어서야 착수됐다. 국세청이 삼성전자의 세무조사 착수 연기 요청을 받아들이면서도 관련 자료 준비 요구 및 일정 협의는 계속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와 관련 재계 일각에서는 국세청이 소멸시효가 지나 부과할 수 없는 상속세 대신 이 회장에게 증여세를 부과할 의도로 이런 자료를 제출하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유언장에 기재되지 않은 만큼 공동상속재산으로 봐야 할 차명주식이 이 회장에게 모두 넘어간 것은 상속인들이 이 회장에게 증여한 것으로 봐야한다는 해석을 국세청이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이건희, 이면합의 자폭?
이병철 회장이 사망한지 오래 돼 상속세는 소멸시효가 지났지만 문제의 차명주식을 이건희 회장에게 물려준다는 유서 등의 증빙문서가 없기 때문에 이 차명주식은 상속인 전체의 공동 유산으로 봐야한다.
그런데 어떠한 공식 배분 절차 없이 이 회장이 모든 차명주식을 ‘상속’이란 형식으로 명의를 넘겨받게 된 배경에는 상속인들 사이에 차명주식을 이 회장에게 넘기는 대신 이 회장으로부터 모종의 반대급부를 받기로 이면에서 합의가 있지 않았겠냐는 추리를 가능하게 한다. 특히 이건희 회장 측이 CJ에 보냈다는 문건(상속에 이의 없다는 데 동의)은 다른 상속인들에게 전달이 됐을 것이고, 이는 차명주식 문제를 놓고 상속인들 사이에 2008년 당시 합의가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삼성가의 장남으로서 상속지분이 가장 큰 이맹희씨의 경우 삼성 그룹 경영승계에서 물러난 이후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낭인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가 2008년 당시 상속인들의 차명주식 문제 협의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면 어긋나 보이던 이번 논란의 전체 그림이 완성된다. 이와 관련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실은 15일 “국세청이 지난해 이 회장에게 삼성생명 주식 등이 자신의 상속재산임을 증명하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 회장이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증여세를 부과받을 수 있다”며 국세청에 관련 해석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러한 해석이 받아들여질 경우, 이건희 회장이 국가에 내야할 증여세의 규모는 2조3000억원에 달한다는 게 이정희 의원 측의 주장이다.
지배구조에 큰 영향 우려
재계에서는 이번 상속권 소송에서 이씨가 이길 경우, 삼성그룹 지배구조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생명 최대주주인 이 회장이 이씨가 요구한 삼성생명 주식 824만주(4.12%)를 넘기면, 2대주주인 에버랜드가 최대주주로 올라 금융지주회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삼성생명은 금융지주회사법에 따라 보유 중인 삼성전자 주식 1062만여주(7.21%)를 매각해야 한다. 현행 금융지주회사법은 금융지주회사의 자회사가 된 금융회사는 금융업을 영위하지 않는 회사를 지배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결국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의 수직구조로 연결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가 바뀔 수 있어, 삼성그룹이 이를 막기 위해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 이 회장은 삼성생명 지분 20.76%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며, 삼성에버랜드는 19.34%의 지분을 보유해 2대주주다. 소송 규모 역시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씨가 현재까지 제기한 소송규모만 현재 7000억원대(14일 종가 기준)인데다, 삼성전자 주식 57만주에 대해 추가 소송을 할 경우 그 규모가 2조원대로 크게 확대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씨가 승소할 경우, 범 삼성가 전체의 유산다툼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범 삼성가에는 CJ와 신세계처럼 승승장구하는 기업들도 있지만 몰락한 곳도 있다. 이건희 회장의 형이자 이맹희씨의 동생인 故이창희 새한그룹 회장의 장남은 회사가 무너진 후에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고, 차남은 2010년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故이창희 회장은 이건희 회장보다 형이기 때문에 상속지분도 더 큰 만큼 남아있는 유족들이 상속지분을 요구할 경우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더욱 취약해질 수 있다.
내우외환…위기의 삼성전자
7개월째 세무조사에 국내외 전방위 압박까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위기만큼 삼성전자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역시 심각한 상황이다.
우선 지난해 7월 시작된 삼성전자 세무조사는 반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되고 있어 결과에 따른 추징금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기업에 대한 정기 세무조사는 3개월이면 마무리 되지만, 삼성전자에 대한 세무조사는 7개월이 된 지금까지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세정가에서는 이러한 조사 기간과 강도 등을 감안할 때 추징금 규모가 최소 1000억원에서 많게는 수천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는 2007년 하반기에 실시한 정기 세무조사에서 국세청이 삼성전자에 물린 추징금 180억원보다 최소 5배 이상되는 금액이다. 경영 자체의 위기도 심각하다. 스마트폰 ‘공룡’ 애플과 힘겨운 소송전을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가 최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로부터 반독점 조사까지 받게 된 가운데 공정거래위원회가 올해 초 소비자 집단소송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도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1월31일(현지시각) 삼성전자를 상대로 반독점 관련 규정 위반 여부에 대해 공식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