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이광표 기자] 한국은행이 동네북 신세다. 저물가와 금융시장 불안이 지속되며, 이를 한은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정부 인사는 한은의 독립성을 흔드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국책연구원은 한은의 통화정책을 두고 작심비판에 나섰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불과 2주 전인 지난 16일 기준금리를 인하한 한은을 향해 사방에서 '금리를 더 내리라'는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공개석상에서 금융통화위원회에 정부 인사가 참여하는 '열석발언권'을 언급한 데 이어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물가변동에 한은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모두 추가 금리인하를 우회적으로 요구한 것이어서 한은의 통화정책 평가를 둘러싼 논쟁도 더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28일 KDI가 발표한 '최근 물가상승률 하락에 대한 평가와 시사점'이란 보고서는 최근 통화정책의 양대 책무인 '물가안정', '금융안정'에 대한 한은의 책임론에 불을 지폈다. 한은의 '통화정책'은 실패로 규정지었다. KDI는 한은 본연의 책무를 '물가안정'으로 전제하고 "통화정책이 물가변동에 충분히 대응하여 수행되지 못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금융안정' 책무의 재검토를 요구했다. KDI는 "금융안정을 명시적 목표로 삼고 있는 현재의 통화정책 운용체계는 물가상승률 하락을 기준금리 인하로 대처하는 것을 제약할 수 있으므로, 통화정책이 본연의 책무인 물가안정을 중심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운용체계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KDI의 이같은 주장은 한은의 금리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내려온 상황에서 추가 금리인하를 요구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향후 한은의 추가 금리인하를 비롯한 외부의 압력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특히 정부의 압력으로 가정할 경우에는 한은의 '독립성'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논란의 소지가 크다.
지난 24일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 참석해 “필요하면 열석 발언권을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열석발언권'은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한은 금통위에 정부 인사가 참석해 입장을 전달하는 제도로 2013년 이후 행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홍 부총리가 앞서 여러 차례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조화를 강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열석 발언권을 이용해서라도 한은에 ‘기준금리 인하’를 요구하겠다는 것으로 의미로 해석된다.
이 자리에 함께 출석했던 이주열 총재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총재는 "열석 발언권은 행사도 되지 않고 있고 실효성은 없는데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간섭으로 비춰질 소지가 있다"며 "제도를 없애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일각에선 통화정책의 수장으로써 그동안 정부 경제정책에 보조를 맞추기 위한 통화정책을 전방위로 펼쳤음에도 '독립성'을 흔들만한 정부 측 인사의 발언은 이 총재 입장에서도 불편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이전에는 금통위 내부에서만 벌어지던 논쟁이 기준금리가 역대 최저인 연 1.25%까지 내려오면서, 곳곳에서 한은을 흔드는 목소리로 퍼지고 있다"며 "전세계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의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지만, 한은의 경우 정부나 정치권의 압박에 빈번하게 시달리는 것이 매 정권마다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