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원 정보통신정책연구원 방송미디어연구실 연구위원
[매일일보 기고] 지난 3월 11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중장기 방송제도개선 추진반’이 제출한 정책제안서를 접수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추진반의 일원으로 일 년여 동안 활동했던 필자로써는 ‘밀린 숙제를 했다’라는 기분보다 오히려 더 많은 숙제를 던지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중장기라고 하면 기간이 어느 정도일까? 혹자는 못해도 그만이거나 그 때 가봐야 알만한 것들을 중장기 과제로 밀어 둔다는 것으로도 인식할 수 있다. 오래된 불신이다. 달리 생각하면 방송환경의 변화가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방송광고, 시청률, 영업이익 등 방송사업자의 경영지표에 적색신호가 들어 온 지도 꽤 오래됐다.
변화와 혁신은 방송사 혹은 방송사업자에 의해 이뤄지기도 하지만, 제도라는 외적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방송구조, 방송제도, 방송정책의 근간은 방송법이다. 20년 전에 성안된 방송법은 오래전에 그 소명을 다했다는 문제제기를 넘어, 오히려 방송의 변화와 혁신을 막고 있다는 소리마저 들린다. 일반적으로 방송법이 낡았다, 소명을 다했다라는 것의 실체는 ‘교차보조(cross subsidization) 시스템’에 있다. 교차보조는 동일 산업 내에서 한 부문의 결손을 다른 부문에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충당하는 것을 말하며, 일명 내부보조(internal subsidization)라고도 한다. 미국 시카고대 법경제학자 포스너는 ‘정부규제의 과세(taxation by regulation)’ 이론을 통해 정부규제는 교차보조를 통해 보조가 없이는 서비스 공급이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한 부문에 서비스 공급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공익을 실현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방송법이 추구하는 방송의 공공성, 공익성 등을 실현하기 위한 공적책무 구현의 정당화 메커니즘은 수탁제 모델하의 교차보조시스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주파수 희소성에 따른 시장실패 문제를 보정하기 위해 정부가 믿을 만 한 자에게 배타적 사업권한을 부여하고(독점 규제), 그에 따른 공적책무를 부과하는 교차보조시스템은 신규매체나 채널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제한적이나마 작동을 했다. 그리고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신규매체와 채널이 등장한 후부터 방송사업자의 독점적 이익이 감소함에 따라 공적책무 비용을 보전하는 데 어려움이 지속됐고 방송의 공공성, 공익성 구현을 위한 비용을 충당하기도 어려운 상황까지 내몰린 상황이다.
방송용 카메라가 스마트폰 카메라로, 그것이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에서 20세기 초엽에 국가가 방송에 위임한 공공성, 공익성 실현 의무는 여전히 유의미한가? 글로벌 경쟁, 인터넷 융합 국면에서 방송미디어사업자들에게 공공성, 공익성이란 무엇일까? 그것을 구성하는 실체적 서비스와 콘텐츠는 무엇일까? 정부와 시장의 역할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정책제안서는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또 다시 숙제만을 남겼다. 세부 정책과제들은 더 많은 연구와 공론의 장에서 치열한 숙고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