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경복궁 인근 서촌 소재 필자가 운영하는 갤러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시를 시작했다. 똑같은 작품들을 이곳 서울에서도, 머나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도 감상할 수 있는 전시다. 같은 작품 두 점을 동시에 전시하는 것이냐고? 아니다. 증강현실(AR)을 통해 같은 작품을 관람객 누구나 동시에 감상하는 방식이다.
전시장은 서울의 필자 갤러리와 바르셀로나의 ‘아물레토 아트’ 갤러리다. 두 갤러리 모두 전시장 벽에 작품을 연결시키기 위해 만든 마커(marker)를 설치했다. 관람객이 스마트폰으로 필요한 앱을 열고 마커를 향하면 해당 작품이 화면 안으로 나타난다. 마커와의 거리를 넓혔다 좁혔다 하면서 작품의 전체 혹은 디테일을 마치 눈앞에 작품이 걸려있는 것처럼 감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AR 렌즈 앱을 새로 개발했다. 전시를 시작한 15일 서울과 바르셀로나 각 전시장에서는 실시간 영상 통화 화면을 통해 서로의 오픈을 축하하기도 했다. 역시 첨단기술 덕분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코로나19에 막혀 고사 중인 전시산업의 활로를 모색하던 중에 나왔다. 생각해보니 첨단기술을 활용하면 비단 코로나 장벽만을 넘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과 장소의 벽마저 넘을 수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큰 타격을 받은 스페인의 예술인들도 필자와 공감대를 이뤘다. 아물레토 아트의 발렌티노 카루소(Valentino Caruso) 대표는 “앞으로도 첨단기술과 예술을 결합하려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를 할 것”이라고 했다.
필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과 스페인, 두 사회가 마주한 쟁점들을 폭 넓게 조망하는 기회도 함께 모색했다. 젊은 지성이 번득이는 양국의 신진 작가들이 기꺼이 참여해줬다.
류주항 사진작가는 서울의 산과 인공조명이 내뿜는 밤하늘을 나란히 배열해 객관적인 시점이 없는 구도를 연출하며 도시와 인간에 대해 진지한 탐색을 계속해 왔다. 최은혜 작가는 부드럽고 세심한 색채와 기법이 먼저 보이지만 상반되는 표현된 형태의 간결함과 에너지가 특징이다. 황지현 작가는 일상의 관계에서 나오는 심리적 감응과 충돌을 시각화하는 작가다.
재클린 챙(Jacqueline Tsang) 작가는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의한 어두운 심리로 은밀하고 순간적으로 담긴 화면을 구성하는 실력이 일품이다. 조디 디아즈 알라마(Jordi Diaz Alamà) 작가는 주로 고전문학에서 영감을 받은 스토리텔링이 특징이다. 소코(Soko) 작가는 ‘정글’의 침묵, 움직임, 유기적인 생명력을 주제로 무질서 사이에서 우직하게 뿌리 잡은 본질을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