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고] 조광한 남양주시장 "선거 실패.. 곧 국가의 실패"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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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고] 조광한 남양주시장 "선거 실패.. 곧 국가의 실패" (26)
  • 김동환 기자
  • 승인 2021.08.08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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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동환 기자] 세계의 수많은 독재자들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처참하게 최후를 맞은 독재자가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입니다. 올림픽의 전설,체조요정 코마네치의 나라입니다.

차우셰스쿠는 1965년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를 승계 받아 집권했으며 1967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89년까지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1971년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 루마니아로 돌아와 독재와 공포통치를 했습니다.  ‘어버이 수령’ , ‘민족의 태양’이라는 호칭을 흉내 내서 ‘카르파티아 산맥의 천재’ 또는 ‘정열적이고 총명하며 매력적인 인격의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 줄여서 ‘지도자, 영도자’라고 칭하며 개인 숭배에 모든 힘을 쏟았습니다.

자신과 가족들에 대한 우상화 작업으로 살아있는 신처럼 신봉되었고, 본인과 부인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부인과 일가족과 처가 식구들까지 요직에 앉히는 족벌 정치를 했습니다. 부인은 공산당 서열 2순위였고, 차남 니쿠는 왕자로서 군림했으며, 며느리와 일가친척 사십여 명을 행정부와 공산당 요직에 임명했습니다. 

그의 정치는 말 그대로 공포 통치였습니다. 특히 도청을 통해 국민들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까지 
모두 통제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2천만 명이었는데 전국 각지에 300만 개의 도청기와 천여 개의 도청 센터를 설치해 빈틈없이 감시했고, 국민들은 집안에서조차 자유롭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토론 수업을 빙자해서 학부모가 한 이야기를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수집된 이야기 중에서 차우셰스쿠 정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담긴 내용은 상부에 보고되었고 
부모들은 곤혹을 치렀습니다. 

차우셰스쿠는 고아 출신 요원들을 어려서부터 훈련시켜 친위 보안대로 만들었습니다. 그 요원들은 암살, 정보 수집 등의 임무를 맡았고 차우셰스쿠의 독재를 유지하는 밑바탕 중 하나였습니다. 

무리한 산업화, 차우셰스쿠 일가의 호화로운 사치로 경제는 파탄 났고, 경제파탄을 국민에게 숨기기 위해 “상점에는 유기농 식품이 가득합니다.”는 등의 다양한 선전포스터를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식품가게의 진열장은 텅텅 비었고,사람들은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야 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에너지 절약 정책을 실시했는데 전기와 온수 공급을 중단하고 아파트에도 한 겨울에만 조금씩 난방을 넣어 주었으며, 냉장고와 진공청소기의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전구는 40와트짜리만 사용하도록 했고 1집 1등 켜기 규정을 만들고 철저히 감시했습니다.  경제력 확보를 위한 인구증가를 계획해 낙태와 피임을 금지하고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4명 이상의 아이를 강제로 낳도록 했습니다. 아이 수를 채우지 못하면 ‘금욕세’라는 이름으로 연봉의 20~30% 정도의 무거운 세금을 물렸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장애인, 불임 여성, 성 불능 남성에게까지도 세금을 물렸습니다. 
그러자 경제적으로 궁핍한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낳은 아기들을 방치하거나 시설에 맡기며 아동 유기가 급증했습니다. 열악한 시설에서 영양 결핍으로 영유아사망률이 폭증했고, 무리한 출산으로 산모의 사망률도 크게 증가했습니다.  정권 말기에 차우셰스쿠를 비방하는 전단과 대자보가 전국에 나돌자 그것들이 타자기로 쓰여졌다는 이유로 타자기 사용을 금지시켰습니다.

국민들이 최악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임에도 1983년부터 수도인 부쿠레슈티에 인민궁전을 
건설했습니다. 세계에서 미국 국방부 건물인 펜타곤 다음으로 거대한 건물입니다. 그러나 인민궁전이 완공되기 전에 그가 사망해 현재는 미완성으로 건물 일부만 국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24년 독재는 단 10일 만에 무너지게 됩니다. 

1989년 12월 16일 인권운동가 목사를 국외 추방한 것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100여 명이 사망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12월 21일 차우셰스쿠는 10만 명을 동원해 자신을 지지하는 관제대회를 열지만
군중은 오히려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대로 돌변했고, 보안대를 앞세운 무자비한 진압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그러자 군과 경찰이 민주화시위에 가담하게 되고 보안대와의 시가전이 벌어지며 시위가 더욱 격화되자 하루만인 12월 22일 관저 옥상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외국으로 도망하려 했습니다. 헬기가 관저를 떠나는 장면은 TV로 생중계 되었습니다. 조종사는 헬기를 좌우로 흔들며 사격을 받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 헬기를 착륙시켰고, 차우셰스쿠 부부는 육로로 도망치다가 다음날 발각되어 체포됐습니다. 

이틀 후인 12월 25일, 비밀 군사재판이 열렸습니다. 검사는 “개인적으로 사형에 반대하지만 
이놈은 인간이 아니므로 사형을 구형한다.”고 했고, 사형판결을 받은 지 1시간 반 만인 오후 4시, 
부부는 담벼락에 세워져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3명의 군인이 180발의 총탄을 쏘았고 두 사람은 무려 120여 발의 총탄에 맞아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처형 장면은 녹화되어 전 세계 TV에 공개되었습니다.  차우셰스쿠의 처참한 최후는 사악한 독재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만천하에 똑똑히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도 있듯이 혹시나 또 독재의 성향을 가진 인물이 우리나라를 좌지우지 한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재앙이 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다음 스물일곱번째는 아프리카의 학살자, 검은 히틀러라고 불렸던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살펴보겠습니다>

담당업무 : 경기동부권 취재본부장
좌우명 : 늘 깨어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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