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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고 여전히 난무하는 폭력을 근절하여 남녀 성별 차이 없이 ‘여성이 안전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려는 사회적 가치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요원한 환몽(幻夢)에 불과할 뿐인지 아쉬움이 크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9월 5일 발표한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이라는 보도자료에 의하면, 2020년 대한민국 여성들의 삶에 대한 만족도는 62.1%로 남성의 61.0%에 비해 1.1%포인트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2020년 사회 안전에 대한 전반적 인식도는 여성이 27.6%로 나타나 남성의 36.0%보다 무려 8.4%포인트나 낫게 나타났다. 특히, ‘범죄 안전’ 항목에선 ‘매우 또는 비교적 안전하다’라고 답한 여성은 21.6%에 그쳐 남성의 32.1%보다 무려 10.5%포인트나 큰 격차를 나타냈다. 이는 우리 사회가 범죄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끼는 여성은 10명 중 겨우 2명뿐이고, 나머지 8명은 언제든 범죄의 타깃(Target)이 될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는 풀이다.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2021년 여성인구는 2,586만 명으로 총인구(5,182만 2천 명)의 49.9%이며, 성비(여성 100명당 남성 수)는 100.4명으로 2000년 대비 1명 감소했다. 그러나 2021년 여성 가구주 비율은 32.3%로 2000년 대비 13.8%포인트 상승했다. 2020년 여성 1인 가구는 333만9,000가구로 2000년 127만9,000가구 대비 2.6배 늘어난 규모이다.
이러한 추세 속에 여성 대상 성폭력 범죄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가정폭력 검거 건수는 5만277건으로 2011년 6,848건 대비 7.3배 수준으로 증가하였으며, 검거 인원은 5만9,472 명이나 되며, 2018년 4만1,905건 대비 20% 증가하였다. 성폭력 사건 발생 건수는 2019년에 3만1,400건으로 2010년 2만375건보다 약 1.5배 증가했다. 여성 대상 데이트폭력과 스토킹 검거 건수도 지속적인 증가 추세이다. 2019년 데이트폭력 검거 건수는 9,858건으로 2013년 7,237건 대비 2,621건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스토킹 검거 건수도 2013년 312건에서 2019년 581건으로 늘어난 것 등은 여성들이 사회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기에 충분한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여성이 불안과 공포가 가중되는 위험사회에서 여성 스스로 자신을 지키라고 방임(放纵)하고 방기(放棄)하는 사회는 결코 안전하고 행복한 세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여성의 안전 체감을 높이는 일은 평등 사회로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목표이며 핵심적인 가치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왜냐면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시간 동안 어느 한순간도 의식밖에 둘 수 없는 가치는 ‘안전’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위험사회’에서 “문명과 과학기술의 발전이 초래한 위험들은 더는 통제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렀으며, 위기의 원인이 된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위험사회의 도드라지는 특징 중의 하나는 ‘위험의 불평등과 부메랑 효과’이다. 즉,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 산업의 고도화로 빈부격차는 더 커가지만, 산업고도화의 부산물인 재난이나 재해 그리고 기후 위기나 원전 사고 같은 후기산업사회의 위험은 남녀, 사회계층, 세대 등 차별 없이 민주적으로 동등하게 퍼져 영향을 준다. 따라서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위험 대처능력의 차이는 국가가 메워주어야만 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존 C. 머터(JOHN C. MUTTER)’ 교수는 ‘재난 불평등(The Disaster Profiteers)’에서 ‘왜 재난은 가난한 이들에게만 가혹할까?’라는 부제로 재난의 불평등을 강조하고 “재난의 상황은 늘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하며, 자연보다는 인간이 인간에게 더 큰 피해를 준다.”라고 역설했다. 또한, 미국의 심리학자 ‘키스 페인(Keith Payne)’은 ‘부러진 사다리(The Broken Ladder)’에서 우리 사회를 가득 메우고 있는 불평등이 어떻게 나의 일상적 행동, 심지어 정치적 선택을 조종하는지,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한다.
위험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찾아가겠지만 정도와 속도에서는 많은 차이가 난다.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먼저 찾아가 영향을 크게 미친다. 강력범죄 피해자 중엔 남성보다는 여성이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은 게 현실이다. 대검찰청 자료에 의하면,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범죄에서 발생하는 여성 피해자 비율은 2000년 71.2%였으나 2017년엔 90%를 넘었다고 한다. 강력범죄를 당하는 사람 10명 중 9명은 여성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래서는 여성들이 안심하고 안전하게 사회생활을 영위하며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치안 역량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서도 결단코 뒤처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차제에 치안과 안전 공백은 없는지 주도면밀히 살펴보고 약한 부분은 보강하고 폐해를 줄이는 일이야말로 복지국가의 준엄한 책무이자 당연한 소명이다. 재난 약자인 여성의 안전을 더는 방치(搭建)할 수 없는 분명한 이유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평가와 체감에서 남녀 간 성별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건 우리가 추구하는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닐뿐더러 하루속히 바로잡을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안전’은 단순히 젠더(Gender) 차원에서 접근할 사안이 아니다. 국민의 행복 추구권 중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 보고 국가역량을 모아야 한다. 양성이 행복한 여성정책 추진,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건강한 가족문화 조성, 다문화가족의 삶의 질 향상,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 강화 등 여성가족부와 경찰청. 소방청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의지적인 정성과 지속적인 관심 속에 여성이 안전하고 행복한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국민 전체가 다 함께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사안이다.
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現 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