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이번에는 ‘유럽의 시궁창’으로 불렸던 스웨덴이 세계 최고의 복지를 이루고 북구의 낙원이 되는 과정과 탁월한 리더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스웨덴 경제는 조금씩 성장했지만 1929년 대공황이 터지자 스웨덴에도 경제 위기가 닥쳤습니다. 1931년 성장률 마이너스 6%를 기록하며 실업률은 25%를 웃돌았습니다.
그때 빈곤타파를 위해 봉기에 나선 농민들을 향해 군이 발포하고 5명이 사망하자, 엄청난 소용돌이에 빠져들며 내전의 위기감마저 감돌았습니다.
정부의 강경진압과 과격시위를 동시에 비판하고 나선 정당이 있었는데 사회민주노동당,약칭 사민당입니다. 이들은 좌파로서 공산당과도 연대했지만, 급진 사회주의 혁명과는 선을 그었습니다.
20세기 초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의 혁명에 의한 자본주의의 자동몰락을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의 삶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사민당의 경제정책 설계자인 비그포르스 의원은 이러한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이 꿈꾸는 ‘궁극적 낙원’이 저절로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몇 십 년, 몇 백 년 뒤에 찾아올 낙원을 준비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낙원은 인류 역사의
시작에도 없었고, 마지막에도 없을 것 입니다.”
혁명 한 번으로 펼쳐지는 낙원을 꿈꿀 것이 아니라 낙원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힘쓰자는 주장이었고, 낙원만을 꿈꾸지도 말되 낙원으로 향하는 발걸음도 멈추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의 핵심이 바로 복지였습니다.
그는 구체적인 정책들을 내놓았습니다. 연간 2주 간의 유급휴가, 출산 및 양육 수당, 누진적인 상속세와 소득세 등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복지정책들을 기획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세금 증가 때문에 반대에 부딪히자 그는 국민의 눈 높이와 언어로 말하면서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대중정치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때 그의 눈에 띈 한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페르 알빈 한손이었고, 비그포르스 의원은 그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한손은 이해하기 쉬운 말로 복지국가를 설명했습니다. “훌륭한 집에서는 독식하는 사람도 없고 천대 받는 아이도 없다. 편애를 받거나 따돌림 받는 사람도 없다. 다른 형제를 얕보지도 않고 그를 짓밟고 이득을 취하지도 않으며 약한 형제를 무시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가를 가정에 빗대어, 국가는 국민의 따뜻한 집이어야 한다고 설명한 ‘국민의 집’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들은 ‘가정처럼’ 포근한 복지국가를 떠올렸습니다. 이를 통해 사민당 또한 급진적이고 추상적인 이론만을 앞세우는 불안한 이미지에서 든든한 장남의 이미지로 거듭났습니다.
마침내 1932년 9월 총선에서 사민당은 과반을 차지하며 집권당으로 올라섰습니다. 한손은 총리가 되고 비그포르스는 재무장관이 되어 본격적인 복지정책들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민당의 정책을 좌파와 우파 모두가 비난했는데, 좌파는 “자본주의와 타협한 줏대 없는 실용주의일 뿐”이라고, 우파는 “언젠가는 공산주의를 이루려는 빨갱이들의 술수일 뿐”이라고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복지정책을 기획한 비그포르스 재무장관은 “이념이 아닌 ‘사람’이 목적이다.”라고 일갈했습니다. “생산의 목적은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생산체계가 오히려 주인이 되고 있다. 인간은 생산도구의 주인이지,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시 노동계와 사용자 간의 대립이 극심했지만, 한손 총리 취임 후 사회적 대타협이 이루어져 노동쟁의는 세계 최저수준으로 떨어지고 대화와 타협의 ‘산업 평화’가 자리 잡았고 이후 경제는 급성장했습니다.
한손 총리는 194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14년을 총리로 재직했습니다. 사민당은 무려 44년을 집권하며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고 스웨덴은 현대 복지국가의 세계적인 모범이 되었습니다.
한손 총리가 재임하던 2차 세계대전 때 중립을 선언한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독일이 침공했지만,
같은 중립국이던 스웨덴은 독일에게 부대이동을 위한 철도를 내주며 국가적 자존심이 훼손됐지만 침공은 면했고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과 대공황, 전쟁으로 어려웠던 스웨덴을 구한 한손 총리는 스웨덴 정치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는 국민들이 조국을 따뜻한 집으로 여기게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정작 자신은 집 한 채가 없었습니다.
그 후임인 사민당 타거 엘란데르 총리는 한손 총리와 함께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국민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23년간 재임하며 각계각층 사람들,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과도 계속 멈추지 않는 대화를 했고, ‘국민의 집’ 정책을 완성했습니다. 그는 국민들의 만류에도 은퇴를 했고 그 또한 퇴임 후 집 한 채가 없어 국민들이 별장을 지어줬습니다.
스웨덴의 탁월한 지도자들은 복지제도를 크게 확충하면서 높은 경제성장도 함께 이루어냈습니다.
이후 정치인의 청렴성은 엄격한 전통이 되었습니다.
TV수신료를 내지 않은 장관이 경질되고 집수리를 허가대로 하지 않은 총리는 법정에 섰습니다.
국회의원 이직률은 평균 30%에 이르는데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입니다.
하루 12시간을 일하지만 개인 정책보좌관이 없고, 비서가 없어 전화도 직접 받습니다. 바빠서
택시를 타면 공금 유용으로 경고를 받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국회의원들이 많습니다.
스웨덴의 정책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세금이 자신을 위해 쓰인다는 신뢰감과 투명성, 설득과 타협의 정치, 복지정책과 사회적 안전망은 우리가 많이 참고해야 할 모범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또, 지도자의 자질과 능력이 국가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움직이는 국가로 스웨덴의 옆 나라 노르웨이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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