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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전역을 폭격하는 ‘군사명령’을 통해 침공을 시작한 지 72일째(5월 7일 기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전쟁은 언제 어떻게 끝날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이 일체화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강화하고,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전례 없는 제재성 조치를 가하고 있지만, 러시아의 경제가 그렇게 핍박을 받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정치·외교·국방뿐만 아니라 경제·산업·과학·기술 등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경제를 주도하는 리더십과 에너지 및 식량 안보, 군사 기술, 시가전 교리 등에 이르기까지 되새길 만한 교훈이 쏟아진다. 그러나 숱한 교훈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꼽으라면 그것은 동맹(结盟)의 중요성이다.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이 겪는 참상은 믿을 만한 동맹을 못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차이는 동맹의 존부(存否)에 있다.
그런데 한·미동맹의 지난 68년이라는 긴 시간이 그러했다. 군사와 안보 분야에서는 혈맹(血盟)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불가분(不可分)의 밀접한 관계 그 이상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경제, 산업,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비교적 협조 관계를 잘 유지해 왔다. 다만 경제협력 장치가 상시화, 상설화, 체질화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지난해 끊긴 한미 통화스왑(Currency swap │ 자국의 통화를 맡기고 상대국의 통화를 빌리는 통화교환)과 초기에 심각했던 코로나 백신 공급난이 그런 사례이다.
요즘 경제와 안보를 융합한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가 핵심 이슈(Issue)로 뜨고 있다. 냉전체제가 종식된 1950년대 이후 주목받지 않았던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며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를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와 동격화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고, 최근 WTO 분쟁 사건을 통해 유의미하게 인정받으며, 오늘날 주요국들의 대외정책 기조를 이루어 온 터에,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발 대규모 봉쇄 조치가 장기화하면서 글로벌 공급망 대란의 경고음이 커지고, 국제적 관심이 부각(浮刻)하면서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는 민생에 직결되는 국가의 최우선순위가 되었고, 외교의 양상도 바뀌고 있다. 본래 경제와 안보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외교와 경제 사안 역시 보다 더 밀접하게 연계되며 그 경계가 더욱 희석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지난 30년간 지속돼온 세계화의 종말을 고하고 있음이 선연히 들려오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런 분위기에 결정적 펀치를 가했다. ‘가치 투자의 대가’로 불리는 하워드 마크스(Howard Marks) 미국 사모펀드 오크트리 캐피털(Oaktree Capital) 회장은 지난 3월 23일(현지 시각) 밝힌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지난 30년간 경험한 세계화에 종지부를 찍었다”라고 강조하면서, “러시아산 에너지에 의존했던 유럽이 안보 위협을 받고 있다. 이제는 가장 싼 공급 대신, 가장 안전한 공급에 돈이 몰릴 것”이라며 “세계화가 현지화로 전환되고 있다”라고 밝혔다. 또한,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미국 블랙록(Black Rock)의 래리 핑크(Larry Fink) 최고경영자(CEO)도 지난 3월 24일(현지 시각)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지난 30년간 경험한 세계화에 종지부를 찍었다”라고 밝혔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Bridgewater Associates)의 창업자인 레이 달리오(Ray Dalio) 역시 “세계화 추세는 뒷걸음질 치고 이제는 국가주의가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제롬 파월(Jerome Powell) 의장도 지난달 한 행사에서 세계화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묻는 답으로 “확실히 전과는 다른 세계가 될 것”이라며 “각 나라는 결국 더 탄력적이고 더 강력한 공급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세계화가 느려진 것은 분명하지만, 뒤집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오늘날 주요국들이 ‘경제안보(Economic security)’ 정책을 명분으로 채택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통치술(Economic statecraft)은 기존의 다자무역규범과 충돌하고 있는 부분이 많으며, 지역 차원 및 소다자적 형태의 무역 규범 수립을 통해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의 형성을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산업과 통상 간 연계 협력으로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지역별 맞춤형 통상 협력을 강화하겠다”라며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CPTP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 역내 통상 규범도 주도하겠다”라고 밝히고, ‘110대 세부 국정과제’ 전반에 걸쳐 ‘경제안보’를 거듭 강조했다.
작금의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국가안보, 국방전략, 경제산업, 자원공급망, 금융시스템, 과학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상호 연결 융합된 ‘하이브리드 전쟁(Hybrid Warfare)’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전쟁을 목격하고 있다. 재래식 전력뿐만 아니라 사이버 공격, 심리전 등을 동원하는 복합전술이다. 그동안 냉전 시대의 평화를 유지해주는 장치로 인식되었던 핵무기도 어쩌면 사용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직접 참여를 못 하고 간접 지원에 그치고 있다. 결국, 우크라이나 국민의 용감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야욕이 서서히 실현되고 있어 보인다.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앞으로 어느 나라가 침략을 당해도 미국이 직접 나서는 데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유엔 안보리의 러시아 규탄 결의안 투표에서 보여준 인도와 아랍에미리트(UAE)의 기권은 이를 방증하기에 충분하다. 인도는 미국·호주·일본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쿼드(Quad │ 미·일·인·호의 반중국 안보협의체)의 일원이고, 아랍에미리트(UAE)는 친서방 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중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같은 핵심적인 동맹국들의 도움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독자적으로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게 됐다는 징후가 묻어난다. 왜냐하면 21세기에 들어서 힘의 원천은 국제 정치와 군사 외교에 그치지 않고 과학기술과 산업경제 분야에까지 확대되며, 미국 독자적으로 모든 부담을 안을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일본·인도·호주 4개국은 쿼드(Quad)를 통하여 반중국 연합을 재개했고, 미국·영국·호주 3개국은 오커스(AUKUS │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동맹)를 조직하여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미국은 핵 추진 잠수함(SSN) 기술까지 호주에 제공하며 체제를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일본에 오커스(AUKUS) 참여를 요청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어 지난 4월 27일(현지 시각) 미국 하원 군사위원회의 2023년 예산 관련 청문회에서는 미국·영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 영·미권 5개국이 결성한 정보 공유 동맹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에 한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방안이 언급되기도 했다.
최근 들어 글로벌 경제의 가장 큰 화두는 반도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비대면 및 차량용 반도체 수요 급증으로 세계 시장은 그야말로 ‘패닉(Panic)’ 상태에 빠졌다. 손톱만 한 칩이 없어서 자동차 생산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의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을 위한 미국의 핵심 전략은 생산에 필요한 말단 부품에서부터 원료·장비·완제품의 이동 경로인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목적으로 한국·일본·대만 등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호령하는 주요 국가에 ‘칩4(Chip 4) 동맹’ 결성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은 세계 경제 최대 현안인 반도체 공급망 문제에서 중국 반도체 숨통 죄기로 우위를 점하기 위한 회심의 카드다. 우선 메모리 분야 최강자인 한국, 글로벌 파운드리 1위인 대만 TSMC,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술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본 등으로 하여 중국에 대한 ‘반도체 장벽’을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실제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기존 반도체 강국에 위협적이다. 중국은 2025년 핵심 기술과 부품을 70%까지 자급자족하겠다는 ‘제조 2025’ 정책을 마련하고 개별 기업 지원과 인프라 투자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렇듯 국제 정치는 그동안 지리적 위치 중심의 지정학(地政學) 시대에서 이제 과학적 기술 중심의 기정학(技政學) 시대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4월 18일 서울국제포럼(SFIA)의 ‘복합위기 극복과 글로벌 중추 국가 도약을 향한 경제안보 구상’ 오찬 정책간담회에 참석해 “새 정부가 우리 경제 재도약을 위한 기틀을 닦고 경제안보 시대를 철저히 대비해나가겠다”라고 밝히면서 “경제가 곧 안보이고, 안보가 곧 경제”라며 ‘경제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산업통상자원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5월 3일 통상전문가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글로벌 경제 전반에 상시화된 공급망 교란이 통상 환경의 대표 위협요인으로 부상되고 아태 지역의 통상 질서도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다”라면서 “향후 상시화된 공급망 위기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수입국 다변화 등 공급망 안정화 기반을 마련해 나가겠다”라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12월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 “미래국가 흥망에 영향을 주는 △반도체·디스플레이 △2차전지 △사이버보안 △첨단바이오 △첨단로봇·제조 △5G·6G △우주·항공 △양자 △인공지능(AI) △수소 등을 ‘10대 국가 필수전략기술’로 선정하고 10년 내 선도국 수준의 기술주도권을 확보하겠다”라고 밝혔다. 10대 기술 중에서도 산업경제는 물론 국방력 증진에 직결된 기술을 우선하여 개발해야 한다. 하나의 기술로 경제력과 국방력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는 다양한 산업 응용이 가능하고 첨단로봇·제조 분야 등과 함께 국방 분야에도 폭넓은 활용성을 가진다. 또한, 우주·항공 기술 역시 민·군 겸용 기술이다. 양자 컴퓨팅기술도 국가안보 관점에서 매우 큰 전략적 가치를 지닌 일거양득의 기술이다. 또 현재 진행 중인 디지털 전환 가속화에 따라 사이버보안 역시 중요성이 강조되는 분야다. 양자 기술은 사이버보안 강화를 통한 정보 주권 확보에 핵심 역할을 할 것이다.
바야흐로 글로벌 가치사슬(GVC │ Global Value Chain)의 뉴노멀 시대가 도래했다. 외교와 통상의 벽이 무너지는 ‘경제안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미 공급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온 주요국들이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내 공급망 강화 기조로 태세를 전환하면서,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주의 체제와 글로벌화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이에 더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공급망 위기를 절실히 경험한 세계는 ‘가치사슬 재구축’에 나서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원자재시장의 구조적 불확실성도 장기화할 가능성 또한 높은 만큼 특정 국가에 대한 원자재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글로벌 경제안보 협력의 외연을 확장하고 해외자원개발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원자재 가격 변동에 취약한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원자재 비축 확대를 위한 정책 지원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조달청이나 한국광해광업공단 등이 관리하는 주요 원자재 비축량을 중장기적으로 확대하고, 중소기업 지원대상을 늘리고 공급 비용 절감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경제·산업·과학·기술 동맹 강화로 경제안보 시대를 선제적으로 견인하고 주도해 나가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과 코로나19로 앞당겨진 경제안보 시대를 맞아 수출국의 특수 상황이 발생하면 원자재와 ‘소부장’은 곧 ‘무기화’로 이어진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와 중국발(發) 요소수(DEF │ 디젤 배기 유체) 품귀 사태가 이를 극명하게 잘 보여줬다. 특정 국가에 크게 의존하던 소재나 부품의 공급 차질로 완성품 제조 기업과 소비자가 어려움을 겪는 일이 갈수록 잦아지고 있는 현상은 이를 방증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첨단 기술 분야에서부터 한·미간‘포괄적 전략동맹’을 강화하고, 핵심 원료·부품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가일층 공조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오는 5월 21일 예정된 조 바이든(Joe Biden)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글로벌 공급망 불안 등이 심화하는 상황 인식에서부터 경제안보와 과학기술협력 등 한·미동맹을 긴밀히 논의해 가시적이고 괄목할 만한 성과 거양을 기대한다.
흔히들 ‘안미경중(安美經中 │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과 협력)’을 일컫고 있지만, 이제는 다변화해야 한다. 최근 중국 시장엔 삼성 스마트폰과 현대 자동차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삼성, 현대, LG, SK 등 우리 대기업들은 앞다퉈 미국 시장 진출에 나서고 있다. 이제는 경제안보가 시장에서 먼저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방증이다. 중국과는 일정 수준의 경제협력이 불가피한 현실이지만 공급망 안정성 강화를 위해서라도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고 역내 핵심 소재·부품·장비 가치사슬 구조상에서 ‘허브 국가(Supply Hub)’를 발굴하여 대체 가능한 지역 공급선(供給線)을 마련하고 거점별 특화된 산업군의 특성을 고려해 최적의 거점을 선정하는 전략을 구사해 나가야 한다. 예컨대 중국을 대체할 거점으로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순으로, 미국을 대체할 거점으로 멕시코, 그린필드 FDI 순으로, 독일을 대체할 거점으로 프랑스, 이탈리아 순으로 공급망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박근종 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