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사태 초기 골든타임 놓쳐"...정부 대응 비판
뒤늦은 유동성 공급조치...한은 '긴축기조'와도 엇박자
[매일일보 이광표 기자] 지난 4일, 여의도 증권가는 패닉에 빠졌다. 레고랜드 개발 관련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최종 부도 처리가 됐다는 소식이 알려져서다. 다음날부터 ABCP를 보유한 증권사들은 손실을 줄이기 위한 '떠넘기기'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부와 금융당국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도 못한 채 조용했다. "모니터링 강화"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한 달 전 연 3~4%였던 ABCP금리가 7%로 오르고 CP 시장이 발작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왔는데도 정부부처와 금융당국의 위기대응이 부실했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각에선 위기가 고조될때마다 채안펀드 재가동 검토, 금융위원장 특별 지시, 채권 매입 등 단계별로 '간을 보듯' 대응 수위를 높여가는 방식만 있을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정부는 상황이 악화될대로 악화되자 23일, 자금 시장 경색을 막기 위해 ‘50조원+α’를 긴급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채권시장안정펀드(채안펀드) 시동을 켜고,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등이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매입하는 유동성 지원이 골자다.
하지만 이같은 '유동성 공급' 조치마저도 긴축의 페달을 밟던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기조와 상충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정책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의 시선이 뒤따른다.
23일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 참석한 이창용 한은 총재도 "정부의 자금 시장 안정 방안은 미시적인 조치라서 거시적인 통화정책 운영에 관한 전제조건이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준금리 인상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이 총재의 설명이 일리가 있지만, 한은의 딜레마도 커지고 있다. ‘돈맥경화’ 우려에 채권시장에 자금을 공급해야 해서다. 한은은 유동성을 옥죄고, 정부는 유동성을 풀고 있는 통화정책의 '엇박자'도 시장이 우려하는 대목이다.
시장에선 한은이 물가만 잡겠다고 자금시장 경색에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을 거라고 전망한다. 우선 은행권의 적격담보증권 확대와 금융투자협회의 금융안정특별대출 요청 등에 입장을 내놔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일단 27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직접 유동성 공급 없이 ‘핀셋’ 지원이 가능한 적격담보대출 확대는 허용할 가능성이 크다.
한은은 국채·통화안정화증권·정부보증채 등 국·공채만을 담보(적격담보증권)로 은행에 대출을 제공하는 데 여기에 은행채를 포함해달라는 게 은행의 요청이다. 이렇게 되면 대출 자금 확보를 위해 은행채를 발행해 시중의 유동성을 덜 빨아들일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금융안정특별대책'이다. 금융안정특별대출은 한은이 대출을 통해서 유동성을 늘린다는 점에서 기존 통화정책 방향과 엇박자가 날 수 있어서다. 한은의 고심이 큰 부분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은 지난 18일 이창용 한은 총재를 만나 증권업계가 유동성 경색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코로나19 사태 직후 시행했던 금융안정특별대출 재도입을 건의했다.
금융안정특별대출은 증권사를 포함한 보험사, 은행 등 금융사가 우량 회사채(신용등급 AA- 이상)를 담보로 한은에서 돈을 빌리는(대출)는 제도다. 코로나19가 본격화된 2020년 5월 도입됐다가 지난해 2월 종료됐다.
금융권 안팎에선 한은이 금융안정특별대출 재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 한은이 금융안정특별대출 카드를 꺼낸 2020년은 코로나19 여파에 따른 경기 충격을 막기 위해 기업과 가계에 돈을 풀던 시기다.
이와 달리 지금은 한은이 뛰는 물가를 잡기 위해 풀었던 돈을 거둬들이고 있다. 한은은 지난해 8월 이후 약 1년 2개월 동안 기준금리를 연 0.5%에서 3%까지 2.5%포인트 인상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23일 비상거시금융회의에 참석한 뒤 금융안정특별대출 관련 질문에 대해선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오늘 대책에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나 다른 방안(금융안정특별대출)은 빠졌는데 이번 방안들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과 국제금융시장 변동성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필요하면 금통위원회에서 다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한편 자금시장 경색 국면이 길어지면 한은도 지속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전망이다. 만일 정부의 ‘50조원+α’ 규모의 유동성 조치에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한은을 향해 돈을 풀어달라는 시장의 요청이 이어질 수 있어서다.
당장 금통위의 11월 통화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편 이창용 총재는 오는 27일 열리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대출 적격담보 대상 증권에 공공기관채와 은행채를 포함하는 방안을 다루겠다고 밝혔다. 또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기구인 SPV를 활용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방안은 필요하면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