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이자 가계 '17.4조' 기업 '16.2조'..."한계상황 속출"
고민 깊어진 한은…전문가 "금리인상 속도조절 필요해"
[매일일보 이광표 기자] 한국은행이 올해 마지막 기준금리 결정을 앞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자이언트 스텝(한번에 기준금리 0.75%포인트 올림)'을 단행하면서 빅스텝 결정 명분은 충분하지만 국내 단기금융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금리인상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최근 물가가 정점을 찍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원·달러 환율이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한은이 추가 빅스텝을 단행하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11일 열린 ‘한국은행-한국경제학회 국제컨퍼런스 2022’에 참석해 "최근 인플레이션과 환율이 비교적 안정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미 연준의 금리인상 속도도 다소 누그러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고(高)인플레이션과 통화정책의 긴축 하에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이러한 자금흐름을 비은행부문으로 어떻게 환류시킬 것인가는 한국은행이 당면한 또 하나의 정책적 이슈"라고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이 총재의 발언을 두고 레고랜드 사태로 인한 단기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베이비스텝’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시장에선 가계와 기업들의 치솟는 이자부담도 우려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방어를 위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금리 인상으로 대출 금리가 급등하면서 가계와 기업의 연간 이자 부담이 현재(9월 말 기준)보다 34조 가까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금리 인상에 따른 민간 부채 상환 부담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기준 금리 오름세가 꺾이지 않는다면 가계의 이자 부담이 올해보다 17조4000억원, 기업은 16조2000억원 커지는 것으로 추산됐다. 한경연은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전망한 한국 기준금리 인상 예측치를 종합해서 이런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연간 52조4000억원 수준인 가계의 이자 부담액은 내년 말 69조8000억원으로 불어난다.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소득이 낮거나 여러 금융회사에서 대출받은 대출자들의 연체 위험은 커지게 된다. 금리가 오르면서 대출이 있는 가계의 평균적인 이자 부담액은 내년 말까지 132만원이 불어난다. 특히 취약 차주(3곳 이상에서 대출받고 소득과 신용도가 낮은 대출자)의 이자 증가액은 330만원으로 급증한다.
한경연은 올해 0.56%인 가계 대출 연체율이 내년 말에는 1.02%까지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승석 한경연 부연구위원은 “금리 인상이 계속 이어지면 빚을 감당하기 어려운 대출자들은 한계 상황에 몰리고, 가계대출 연체율이 높아진다면 금융회사의 건전성까지 악화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기업의 대출 이자 부담액은 지난 9월 33조7000억원에서 내년 말 49조9000억원으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럴 경우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줄이고 경기 침체 위험이 커지게 된다.
금리 상승으로 인한 대출 이자 부담은 가계 살림살이와 기업 경영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한계기업(영업이익으로 대출 이자를 다 갚지 못하는 기업)의 상황이 악화되고, 가계의 소비 위축이 경제 전반에 주름살을 지게 만들 가능성이 커진다.
한경연 전망에 따르면, 내년 말 기업의 연간 대출 이자 부담액(49조9000억원)은 지난 9월에 비해 48% 늘어나는 셈이다. 한계기업의 경우는 이보다 더 가파르게 늘어난다. 올해 총 5조원 수준인 한계기업의 이자 부담액은 내년 말에는 9조7000억원으로 2배에 육박하게 된다.
이승석 부연구위원은 “경기 둔화, 원자재 가격 급등, 환율 상승 등으로 기업의 경영 환경이 악화한 가운데 금리 인상에 따른 대출 원리금 상환 부담까지 커지면서 기업의 재무 여건이 크게 어려워질 전망”이라며 “특히 한계기업과 자영업자가 코로나 타격에 이어 ‘이자 폭탄’까지 맞아 큰 어려움에 부닥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시장 위축과 아울러 경기 침체 조짐까지 보이지만 전문가들은 한국은행이 오는 24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현재 연 3%인 기준금리를 다시 한 차례 올릴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최소 0.25%포인트 인상이 예상된다. 높은 에너지 가격과 환율 등의 영향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여전히 한은 목표치를 한참 넘어선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5.7%로 한은이 목표로 하는 2%의 3배 수준에 육박한다. 한경연은 한은이 시장 예상대로 기준금리를 계속 올릴 경우 가계의 평균 대출 금리가 올해 말 연 4.70%에서 내년 말 5.06%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상 속도가 늦춰지지 않으면 상당한 수준의 금리 인상이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