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풍전등화’ 韓 뿌리산업…경제 근간 흔들린다
2018~2020년 뿌리산업 매출액 13조 감소 해외사 저가공세, 에너지가 상승으로 뿌리산업계 직격탄 정부, 2027년까지 국내 유망 기업 100곳에 4000억 규모 투자
매일일보 = 이용 기자 | 대한민국 제조업 근간을 이루는 뿌리산업계가 열악한 처지에 놓였다. 개발도상국의 저가 공세에 밀리고, 근로자의 기피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뿌리산업은 제조업 전반에 걸쳐 활용되는 기반 공정기술과 사출, 프레스, 정밀가공 로봇, 센서 등 제조업의 미래 성장 발전에 핵심인 ‘뿌리기술’을 다루는 산업을 말한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2018~2020년 사이 매출액 13조원이 증발했던 뿌리산업계의 사업체 수와 매출액이 최근 소폭 회복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는 수치적인 사항일 뿐, 업계에 만연한 열악한 현실은 그대로인 것으로 파악됐다.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의 ‘2022년 뿌리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뿌리산업 매출액은 227조 9406억원을 기록했으며, 관련 사업체 수는 5만 1338개사다. 그 전해 기록(사업체수 3만 553개, 매출액 152조 7233억원)에 비해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졌다.
다만 통계를 살펴보면 뿌리산업의 암울한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앞서 2019년 말 기준 뿌리산업 매출액은 162조 3466억원이었는데, 2020년에는 무려 10조가 감소한 152조 7233억 원을 기록했다. 이보다 앞서 2018년에는 165조 2385억 원이었다. 3년 사이 13조 가까운 금액이 줄어든 것이다.
지난해 증가한 매출 성적은 단순히 업체가 늘어난 덕분으로 분석된다. 2021년 사업체 수는 그 전 해에 비해 약 1.5배 증가했는데, 매출액 또한 이에 비례해 1.5배 가량 증가한데 그쳤다. 사실상 업계 형편은 그대로인 셈이다.
게다가 오히려 영세 업체는 늘어났다. 지난해 통계에 의하면 매출액 5억 미만 뿌리기업은 2만 4278개사로, 이전 해(1만 3529개) 대비 증가했다. 작은 규모로 힘겹게 생존을 이어가는 기업만 1만개 이상 늘어난 형편이다.
또한 국내 뿌리사업체 평균 사업 연한은 17.5년으로, 해외 선진국 제조업체에 비해 현저히 짧아 사업 지속성도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다. 독일의 경우 뿌리 기술을 기반으로 단일 사업에 집중해 100년 넘게 이어가는 중소 제조업체가 많다. 대표적으로 단추 제조 전문 업체 프륌(1530년)과 와인잔 제조업체 포슁어(1568년), 수제화 제조 에드마이어(1596년), 양조 산업체 프리드르(1664년) 등이 있다. 특히 일본에서 100년 이상 장수한 기업 중 중소기업 수는 무려 98% 이상이다. 578년에 설립돼 천년 넘게 존속해 온 곤고구미는 현재도 100명 남짓한 직원을 보유한 중소기업이다. 100년이 넘은 독일의 제조기업은 1만 개 이상인 반면, 국내는 고작 30년을 넘은 뿌리기업이 6100개 정도다.
국내는 오히려 뿌리산업에 대한 무관심으로 유서 깊은 기업마저 도산하는 형국이다. 1912년 창업해 국내 인쇄기업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보진재’는 해외사의 저가 공세에 못 이겨 결국 폐업 수순을 밟았다. 보진재는 중국과 인도 등 인건비 및 원자재비가 저렴한 국가의 인쇄업체와 수 십년 간 출혈 경쟁을 이어왔다.
인쇄 뿐 아니라, 뿌리산업계는 전반적으로 중국을 비롯한 값싼 노동력을 앞세운 개발도상국 제품 및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직격탄을 맞은 실정이다. 물량으로 승부하는 개도국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차별화된 고도의 기술 발전과 관련 인재 영입이 필요한데, 영세한 규모상 연구개발 및 채용에 투자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국가뿌리산업진흥센터에 따르면 뿌리산업계의 이직률은 8.0%(5만 7870명), 부족률은 2.8%이며, 다른 직무에 비해 기능직과 노무직의 이직·부족률이 특히 높은 편이다. 업계의 연구개발(R&D) 투자비는 총 3조 4538억 원으로 매출액 대비 비중은 1.5%다. 국내 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비중이 4.96%임을 고려하면 3분의 1도 못 되는 수준이다.
정부는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뿌리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오는 2027년까지 국내 뿌리산업의 유망 기업 100곳을 발굴해 지원한다고 밝혔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 28일 경기도 군포첨단산업단지에서 ‘K-뿌리산업 첨단화 전략’을 발표했다. 뿌리산업을 고부가 첨단산업으로 개선하기 위해 관련 산업 연구개발에 4000억원 규모의 지원을 투입, 혁신생태계 강화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뿌리산업은 최근 디지털·친환경 제조 패러다임 변화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는 만큼, 이번 지원으로 업계의 숨통이 어느 정도 트일 것으로 기대된다.
서울 충무로의 인쇄소 관계자는 “뿌리기술은 팬데믹이나 전쟁으로 국경이 닫힐 경우, 국민의 자급자족을 보장할 수 있는 핵심 수단”이라며 “저렴한 가격에 혹해 해외 기업에게 국내 제조업의 근간을 넘겨주면 결국 국내 원천 기술이 사라져 버린다. 관련 기업이 최소한의 생존을 이어갈 수 있도록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