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매출 1조’ 국산 블록버스터 신약, 이제는 나와줘야
매일일보 = 이용 기자 | 1990년대 세계무대에서 주목받을 만한 국산 제품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불과 20년 새 국내 기업들은 분야별로 '대한민국'의 인지도를 올려준 블록버스터 아이템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과거 해외에는 가전제품 회사 정도로만 알려졌던 삼성전자는 2000년대 초 휴대전화 시장을 석권, 현재는 ‘갤럭시’가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 아이폰과 경쟁하고 있다. 일본 자동차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현대자동차는 이제 ‘제네시스’로 글로벌 무대에서 고급 승용차 반열에 올랐다.
내수용에 불과했던 국내 문화 콘텐츠도 어느덧 아시아를 넘어 ‘한류’라는 말까지 만들어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영향력이 한국, 일본, 중화권에 한정됐던 국내 연예계는 현재 ‘BTS’를 필두로 서방 국가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벤처기업에 불과했던 국내 게임사들은 글로벌 히트를 치며 거대기업으로 성장, 야구팀까지 운영하고 있다. 역사가 20년도 채 되지 않은 웹툰도 세계 각국에 번역되며 엄연히 한류 문화의 주역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보다도 역사가 깊은 제약산업을 살펴보면 어떨까? 국내 제약산업은 19세기 말 조선의 국경이 개방되고, 서양 의학이 도입되면서 시작됐다. 해방 무렵인 1900년대 초중반 이후부터는 국민들이 누구나 알만한 전통 제약기업들이 등장했다. 무려 100년에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지만 정작 ‘블록버스터 신약’은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국내 제약사의 유명 제품의 이름을 물어보자. 십중팔구 복제약 출신인 일반의약품일 것이다.
반면 글로벌 제약사 MSD의 유명 면역항암제 ‘키트루다’는 2021년도 매출은 171억 8600만달러(21조1817억원)다. 일본 다케다 제약의 희소질환영역의 매출은 유전성혈관부종 치료제 '탁자이로'의 성과에 힘입어 3622억엔(한화 3조원)을 기록했다. 국내 제약사들이 일반-전문의약품 모두 팔아도 1조가 될까말까 하지만, 글로벌 제약사들은 ‘잘 만든 신약’ 하나로 몇 배의 수익을 거두는 셈이다.
‘자본이 없어서’, ‘인재가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삼성전자가 첫 휴대전화를 내놓은 시기는 80년대이며, 국내 아이돌 체계는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 때부터 시작됐다. 각 분야가 몇십 년도 안 되는 사이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았을 때, 제약산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던 셈이다.
그 원인은 국내 제약업계가 ‘돈이 되는’ 산업에만 집중했던 까닭이 크다. 과거 의약분업 이후 정부는 국내 제약산업 육성을 위해 복제약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제약사들은 복제약 수익을 연구개발에 투자하지 않고, 마케팅과 식품 산업 등 ‘돈줄’ 사업에 쏟았다. 몇몇 제약사는 의약품을 위탁생산하는 차세대 캐시카우인 ‘CMO’에 집중하고 있다. 기업이 덩치만 키워서 갈수록 자금이 절실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도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국내사들 또한 신약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부와 국가신약개발사업단이 매출 1조의 블록버스터급 신약을 개발 지원하겠다는 방안을 제시한 만큼, 향후 신약개발 시장이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제약사에서도 부디 ‘BTS’만큼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블록버스터 신약이 나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