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도청 범인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2024-04-18 이진하 기자
매일일보 = 이진하 기자 | 지난주 미국 정부가 한국 국가안보실 등 도·감청 의혹을 놓고 정치권이 뜨겁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 일정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라 대통령실은 사건 진화에 나섰지만, 국민 대부분을 설득하기에 석연치 않은 해명으로 논란만 가중시켰다.
미국의 도·감청 의혹이 제기된 후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미국에서 여러 차례 유감을 표명했다"는 말과 함께 "악의 없는 도청" "유출된 문건의 상당 부분은 왜곡됐다"고 해명했다. 바꿔 말하면 유출된 문건이 있다고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도청을 당한 우리 정부의 대응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피해자'인 대통령실이 '가해자'인 미국 정부의 편을 들고 있다. 특히 논란이 시작됐을 때 "미국과 필요한 협의를 하겠다"고 했던 대통령실이 "사실관계 확인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다가 하루 만에 "미국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라며 거듭해서 '가해자'인 미국을 두둔했다. 13일(현지시간) 미 법무부는 기밀 문건을 유출한 혐의로 공군 주방위군 소속 일병 잭 테세이라를 체포했다. 바이든 행정부 고위당국자는 유출된 기밀 문건 내용에 한국이 포함된 것과 관련한 질문에 "이 사안을 매우 심각하게 여긴다"며 미국이 큰 누를 범한 것 같다고 곤혹스러워했다는 정부 고위당국자의 발언을 전하며 우리 정부와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범인이 잡힌 후에는 그가 올린 기밀문건이 '조작'이라고 강조했던 우리 정부의 주장과 달리 기밀문건에 접근이 가능한 미국 군인이 원본을 찍어서 올린 것으로 확인됐다. 일부 내용이 수정됐을 가능성은 있으나, 문건 자체가 완전히 조작된 것은 아니다. 이번 기밀문건 파문이 문건 위조나 조작으로 발생한 것이 아님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그러자 우리 정부는 "미국이 도청을 했다고 할만한 명확한 근거가 없다"며 "우리도 아직 도·감청 여부를 알 수 없고, 여러 가지로 알아보고 있다" "앞으로 미국이 조사를 통해 알아내야 할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문서가 위조된 것이라고 단언했던 입장을 뒤집은 것은 물론 범인이 잡혔지만 우리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미국이 전 세계를 도청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과거에도 미국 정부는 여러 차례 동맹국 도청을 한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도청을 당한 여러 나라가 이의를 제기했고, 미국은 도청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스스로의 약속을 깨고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는 논란이 된 김 차장의 '묻지 말라'는 말처럼 사안을 축소하기에 바쁘다. 심지어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튀르키예 등 여러 나라가 이 사건과 관련돼 있으나, 정치권에서 정쟁으로, 또 언론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다루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며 이 사안을 전달하는 언론과 이를 지적하는 야당의 권리마저 묵살하고 있다. 늘 '자유'를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가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에는 실제로 어떤 태도를 보여주는지 여실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미 정상회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북한에서 날아드는 미사일이 어느 정부 때 보다 많아 굳건한 한미동맹을 강조해야 한다지만, 우리 정부가 미국을 향해 안보와 관련된 불법 행위 의혹을 항의조차 못하는 것은 동맹이 아닌 식민지적 사고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란 의심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