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정부가 불붙인 전세폐지론

2024-05-22     나광국 기자
나광국

매일일보 = 나광국 기자  |  대한민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집 마련이 꿈이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오른 집값과 대출이자는 그 꿈을 잠시 미루게 했다.

대신 주거사다리 역할을 해온 전세를 통해 그 꿈을 준비한다. 전세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만이 유일무이하게 가진 제도로 가계소득으론 주택 가격을 감당할 수 없자 1970년대부터 성행했다.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을 통해 수입 확보와 투자 확대가 가능했고 세입자의 경우 월세처럼 고정비용이 들지 않아 서로에게 도움이 된 제도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을 강타한 전세사기로 일각에서는 전세 제도의 조정이 필요하단 견해가 나온다. 심지어 일부 전문가들 입에서 나오던 전세폐지론에 대해 정부가 “전세제도가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큰 역할을 했었지만 이제는 수명을 다한 게 아닌가 보고 있다”며 불을 붙였다. 만약에 임대차 계약을 하려는 사람에게 “집에서 나갈 때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세입자는 “집주인이 돌려주겠죠”라고 대답한다. 반면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은행에 맡겨뒀다가 세입자가 나갈 때 돌려줄 것인가요?”라고 물어보면 “예”라고 답하는 집주인보다 “다음 세입자에게 받은 돈으로 이전 세입자에게 돌려주면 되죠”라고 답할 것이다. 이처럼 기존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을 이사 오는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돌려막기 하는 집주인들에게 여유 자금은 없다. 총부채원리금상황비율(DSR) 규제로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만한 규모의 대출도 나오기 힘든 경우가 많다. 지난해부터 수많은 피해자를 발생시킨 전세사기·깡통전세의 원은은 복합적이지만 무자본 갭투자를 할 수 있게 방치한 정부의 정책 실패가 근본원인이다. 원 장관도 이 부분을 지적했다. 그는 “지금처럼 갭투자를 조장하고 브로커까지 껴 전세대출을 받는 등 사기범죄가 판을 치게 한 것은 심각한 문제다”며 “큰 틀에서 임대차3법 전체를 개정해야 하는데 사기나 주거약자들에 대한 피해를 막는 방향으로 본격 연구하겠다”고 언급했다. 다만 시장에서 작동하고 있고 시장수요가 있는 전세제도를 인위적으로 통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전세사기나 역전세를 근거로 앞으로 전세는 없어져야 하는 특이한 제도고 선진국처럼 월세가 일반화돼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최근 불거진 문제처럼 전세제도의 부작용을 줄여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전세제도를 없애면 주거비 부담이 너무 크다. 기준금리 인상, 전세사기 우려로 월세 선호 현상이 시장에 존재했지만 최근 다시 전세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시장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전세가 자연스럽게 선택 받지 못하고 사라지면 좋겠지만 정부가 무리하게 손을 땠다가 더 큰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아직 전세사기 피해자에 대한 보상도 이뤄지지 않았다. 폐지론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