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범 칼럼] 누리호의 숨은 영웅
2024-05-26 기고
매일일보 = 기고 | 1995년 10월 14일, 토요일 저녁 5시 30분, 현대전자 연수생 27명, 통역 유학생, 그리고 러시아 운전사 총 29명이 탑승한 관광버스에 복면을 쓴 괴한이 올라탔다. 카프카스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 30대 중반의 러시아인 납치범은 미화 100만 달러와 항공기를 요구했다. 권총을 들고 있는 납치범은 협조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에 두른 폭탄을 터뜨릴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는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벌어진 최초의 인질극이었다.
붉은광장에서는 당시 모스크바 시장인 유리 루쉬코프가 현장을 지휘했고, CNN을 비롯한 외신 취재진이 현장을 둘러쌌다. 러시아 협상팀은 유학생 통역을 통해 돈가방을 여러 차례 전달하여 인질들을 구해냈다. 루쉬코프 시장은 김석규 당시 주러시아 대사에게 한국어로 ‘엎드려, 엎드려’라는 발음을 문의했다. 이때 김 대사는 러시아 경찰이 무력진압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실제로 레츠키 다리 아래서는 러시아 국가보안부(FSB)의 대테러특수부대인 알파부대와 ‘아몽’ (OMON, 러시아 내무성 특수부대) 요원들이 은밀하게 모의 진압훈련을 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루쉬코프 시장은 한국인들이 순차적으로 풀려날 때마다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김 대사에게 전했다. 목숨을 건 절박한 순간에도 한국인의 희생정신이 두드러졌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통역 유학생의 행동이었다. 새벽까지 이어진 협상 끝에 유학생과 인질범 사이에는 공감과 친밀함이 쌓여갔다. 인질범은 유학생에게 선처를 베풀어 먼저 하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유학생은 자신이 내리면 러시아어를 못하는 한국인 연수생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를 거부했다. 결국 유학생은 마지막 현대직원 4명과 함께 끝까지 버스에 남았다. 새벽 2시 45분쯤 인질범이 돈가방을 받는 순간 아몽 특수부대 요원들이 도끼로 버스 유리창을 깨고 연막탄을 터뜨렸다. 특수요원들은 김 대사에게 배운 ‘엎드려, 엎드려’를 외쳤고, 한국인들은 모두 엎드렸다. 한국말을 못 알아들은 인질범은 그대로 서 있었고, 수십 발의 총알을 맞고 숨졌다. 이것은 영웅의 탄생이었다. 살신성인의 도리를 다한 유학생에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하지만 이 유학생은 모든 인터뷰를 거절하고 돌연 잠적하였다. CNN을 포함한 외신들과 한국 취재진들은 결국 이 위대한 스토리를 놓치고 말았다. 1991년 8월 31일, 모스크바 공항에 한국인 소련 유학 1세대 그룹이 도착했다. 조한범, 정태수, 구본준, 권현종, 김선래, 김영옥, 박종권, 강인구, 이수택, 김영식, 송선정, 조준구, 김재홍, 이상덕, 이철, 계용택, 서견수 등 30여 명의 유학생들이 후에 한러 관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됐다. 그 중에서 서견수는 러시아 유일의 항공우주대학인 모스크바항공우주대(MAI)에서 유학했다. 그는 모스크바 북쪽 외진 곳에서 공부해서 주말마다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친구 집에 놀러 와서 내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하도 눈치를 줘서 특유의 삐짐으로 한동안 놀러 안 온 적도 있었다. 그런 친구가 어느 날 불쑥 우리 집에 찾아와서 취재진을 피해 며칠 동안 쉬겠다고 말했다. 현대전자 연수단 27명의 생명을 구한 영웅인데 왜 인터뷰에 응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당연한 일인데 무슨 생색을 내냐며 오히려 나를 타박했다. 그는 무자비한 특수부대의 진압 작전에 엄청난 트라우마를 오랜 시간 겪었다. 5월 25일 오후 6시 24분,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KSLV-Ⅱ)가 우주를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지난해 6월 21일, 누리호 2차 발사 성공으로 대한민국은 실용급 위성을 쏘아올릴 능력을 갖춘 세계 7대 우주 강국으로 등극했다. 이번 누리호 3차 발사는 드디어 실용급 위성인 차세대 소형위성 2호를 탑재해 위성을 임무 궤도에 사출하여 우주발사체 본연의 역할을 최초로 수행한다. 대한민국이 진정한 우주 강국으로 진입한 역사적인 순간이다. 한국과 미국은 한미 동맹 70주년으로 묶인 혈맹이다. 하지만 정작 한국의 우주로켓 개발에 도움을 준 것은 지금 전쟁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다. 한국과 러시아 우주 개발 협력이 한국이 세계 7대 우주 강국으로 진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러시아 도움이 없었다면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는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서견수 박사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책임연구원 자격으로 한국과 러시아 우주개발협력에 중요한 가교 역할 공로로 두 번이나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번에 발사된 누리호 3차 엔진에도 서 박사의 피와 땀이 묻어 있다. 유학생 시절에는 27명의 소중한 생명을 구하고, 지금은 대한민국이 우주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한 땀 한 땀 보태고 있다. 누리호가 우주를 향해 힘차게 날아가는 이 순간 서견수 박사의 해맑은 웃음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