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연이은 법률안 거부권이 이제는 입법부를 넘어 사법부의 영역까지 확장해 나갈 기세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다음 달 퇴임하는 조재연·박정화 대법관 후임으로 특정 후보를 제청할 경우 임명 보류를 검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사상 초유의 대법관 임명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야당과 시민사회에서는 삼권분립을 침해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헌법이 규정한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헌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헌법 제104조 제2항에 따르면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고 있다. 대법원의 제청권, 대통령의 임명권, 국회의 동의권 등 명확히 나눠 놓았다. 제청 대상이 정해지기도 전에 임명 거부를 시사하는 것은 이러한 헌법적 조화를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국회를 통과한 법률안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은 분명히 헌법에 명시돼 있지만, 대법관 거부권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도 대법관 임명 거부권 논란이 있었다. 대법관에 남성, 기수, 서열에 따라 임명되던 관례를 깨기 위한 개혁 과정에서 일어났다. 노 전 대통령은 대법관 임명 제청 과정이 대통령이 강조해 온 사법 개혁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고 제청 시 임명 거부를 시사했다.
'4차 사법 파동'까지 불리며 파장이 컸지만, 당시 최종영 대법원장이 이후 제청에서는 법관들의 개혁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일단락됐다. 그 결과 전효숙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첫 여성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됐고, 이듬 해에는 김영란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첫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반면 윤 대통령은 단순히 특정 후보를 배제하기 위해서라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관 후보추천위원회가 발표한 후보 8명 중 대통령실의 임명 보류 가능성이 높은 후보는 박순영 서울고법 판사와 정계선 서울남부지법 부장판사로 알려졌다. 박순영 판사는 노동법 전문가로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판결 성향을 보여왔다. 정계선 부장판사는 법원 내 진보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을 지낸 경력이 있다. 모두 윤 대통령과 결이 다른 인사들이다.
물론 헌법에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 거부권이 있다고 보는 법조계 일각의 의견도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대법관 임명권은 대법원장이 제청하지 않은 인물을 임명할 수 없다는 권한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삼권분립 원칙 아래에서 행정부가 사법부를 견제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이미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대법관 제청권을 견제·감시하기 위한 대법관 후보 추천위원회가 존재하고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게다가 추천위에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2월 새시대준비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을 겨냥해 "대통령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다. 하는 거 보면"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취임 후 법률안 거부권을 반복적으로 행사하고 설익은 정책들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때마다 이 발언이 부메랑이 돼 돌아오고 있다.
여소야대라는 불리한 정국을 고려하더라도 대화와 타협 없는 정치 부재 상황은 윤 대통령의 책임이다. 그런 가운데 윤 대통령은 이제는 헌법 위에서 위험한 칼춤을 추려고 한다. 정말 겁이 없어도 너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