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범 칼럼] 러시아를 위한 노래, 누가 부를까

2024-07-05     매일일보
버네이즈

매일일보  |  혜화초, 경신중을 같이 다닌 친구가 있다. 집안이 가난하여 기초생활수급자였지만 공부는 곧잘 했다. 중3 때 그 친구 집에 모여 화투를 쳤는데 항상 돈을 따는 영리한 타짜였다. 어느 날 매형 덕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그 다음부터는 승승장구였다. 미국 명문대를 입학하여 지겹도록 겪었던 가난에서 벗어났다. 예전에 자신을 무시했던 친구들에게 "한국 재벌 2세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

1991년 소련에 유학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스크바에 컴퓨터 모니터를 수출하는 사업을 한다는 것이다. 이후 그와 같이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는 러시아 파트너의 신뢰를 얻어 적지 않은 물량을 수출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그는 "사업에서 실패하는 이유를 모르겠어"라고 자신만만했다. 모스크바의 겨울은 춥고 외롭다. 특히 겨울의 밤은 더욱 그렇다. 그는 호텔 카지노의 공짜 술과 안주를 즐기다가 다시 도박에 손을 댔다. 예전에 미국 대학에서 도박으로 1년 휴학한 아픈 경력이 되살아났다. 내가 극구 말렸지만 그는 "드디어 룰렛의 원리를 터득했다"며 내 조언을 무시했다. 결국 수년간 모스크바 수출로 번 돈을 모두 날리고 수만불의 카드빚까지 얻었다.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해서 아침에 호텔 로비에서 정산을 하는데 옆에 있던 007 가방이 사라진 것이다. 그 안에는 거래처에 줄 수만불어치의 컴퓨터 칩이 있었는데 소매치기를 당했다. 정말 영화와 같은 불운이 겹친 것이다. 그는 나에게 꼭 갚을 수 있다며 도박 자금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내 대학 등록금을 탐낸 것이다. 단호하게 거절했고, 서운한 그는 나와의 인연을 끊었다. 같이 살던 아파트 월세는 고스란히 내가 떠안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지극히 어리석은 도박이었다. 일주일이면 함락당할 것 같았던 수도 키이우는 고사하고 러시아 전차 부대가 섬멸되는 치욕을 맛봤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졸전이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단호했고 1년 반 이 넘는 기간 동안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24일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철회하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이는 용병 그룹의 지도자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군사 대국이자 핵 무기를 보유한 국가인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에게 도전하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1991년 8월 18일 소련 공산당 보수파들이 크림 반도에서 휴양 중이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구금하고 쿠데타를 감행했다. 3일 만에 끝난 이 쿠데타 하나가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위신을 떨어뜨렸다. 전 세계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소련 대통령이 일개 신인 정치인 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 대통령에게 삿대질을 당하는 치욕도 맛보았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구금된 나비 날개짓 하나가 같은 해 12월 25일 소련 연방이 해체되는 비운을 만든 것이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주인공 엄석대는 폭력과 회유로 동급생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학급의 왕노릇을 하였다. 새로 부임한 김 선생에 의해 그의 권위가 무너지자 어제까지 셔틀을 하던 동급생들이 하이에나들처럼 그를 물어뜯었다. 짜르나 다름 없었던 푸틴 대통령은 지금 의연한 척하지만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다. 자신의 요리사였던 삼류 깡패에 불과한 프리고진에게 벌벌 떨는 모습을 전 러시아인들은 똑똑히 지켜보았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강한 짜르 앞에서만 절대적인 복종을 한다. 미친 수도승 라스푸틴에 의지한 나약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결국 처형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괴승 라스푸틴이 위대한 러시아 제국을 몰락시킨 것이다. 나는 소련 유학 1세대로 10년 동안 고르바초프, 옐친, 푸틴 대통령 시대를 모두 경험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 대한 열망으로 미국 대신 러시아를 선택했고, 누구보다도 러시아를 사랑했다. 하지만 유학 말미에 러시아에는 ‘내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도 저축을 하지 않고, 사업가들은 투자를 하지 않는다. 과거 초강대국 시절만 회상하며 살아가는, 넓은 땅과 핵무기를 가진 베네수엘라에 불과했다. 내 젊음을 함께한 러시아였지만 깔끔하게 러시아를 버렸다. 누구나 도박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도중에 카지노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투입된 돈이나 노력, 시간 등이 아까워 계속 베팅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 파산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간다. 푸틴 대통령은 개전 초기 “이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투입된 군대의 엄청난 매몰 비용이 아까워서 그리고 후퇴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으로 지금까지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2010년 3월 23일 한 일간지에 <러시아를 위한 노래 누가 부를까>란 장문의 에세이를 기고한 적이 있다. 글에서 러시아의 한심한 실상에 대해 적나라하게 밝혔었다. 그때 동료 러시아 전문가들은 “무슨 생각으로 글을 썼느냐?”를 비롯한 엄청난 비판과 비난을 했다. 내가 너무 부정적인 면을 편향되게 봤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지금 방송에 나와 크렘린 대변인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반인륜적인 우크라이나 침략을 미화하고, 러시아 졸전에 대해 변명하느라 정신이 없다. 심지어 러시아가 핵을 사용할 것이라고 시청자들을 협박하기도 한다. 외국에서 유학하면 그나라 편을 드는 편향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러시아 운명이 자신의 운명과 결부되는 오류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가치를 잊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엄구호 한양대 국제대학원 러시아학과 교수는 러시아에 대한 가치중립적인 시각이 돋보인다. 다시 미래에 대해 감히 전망하자면 1991년 소련처럼 러시아 연방은 다시 해체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실각하든 말든, 그 누가 권력을 잡든 말든 러시아 연방은 그 운명이 다했다. 고르바초프 이후의 옐친과 푸틴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비공식적으로 세계 최고 갑부가 푸틴 대통령이란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 수 있다. 지도자만 탓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반인륜적인 학살이 이뤄져도 환호했던 러시아 국민들 수준이 딱 그 정도이다. 히틀러가 무력으로 총통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다. 독일 국민의 투표로 희대의 학살자를 뽑은 것이다. 러시아 국민들도 마찬가지이다. 13년이 지난 지금 다시 묻는다. 러시아를 위한 노래, 누가 부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