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밀가루·라면값 내리라는 정부…시장 개입보다 통화정책 등 관건
제과·제빵업계 등 특정 품목 대상 가격 인하 압박 "시장 작동 원리 무시하면 왜곡 나타날 수 있어"
2023-07-10 염재인 기자
매일일보 = 염재인 기자 | 정부가 물가 상승 대책 일환으로 라면·밀가루 등에 대해 가격 인하 압박에 나서면서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 권고에 관련 기업들이 가격을 내리고 있지만, 정부가 인위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방식에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대다수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물가를 잡기 위해서는 시장 개입이 아닌, 통화정책 등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6일 한국사료협회에서 배합사료 제조업체 8개 사와 만나 곡물 가격 하락분을 배합사료 가격에 조기 반영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료용 곡물 가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치솟았다가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지난 5월 톤(t) 당 337달러를 기록, 1년 전보다 5.3% 감소했다. 라면업계의 경우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권고 발언 이후 9일 만에 가격 인하에 들어갔다. 추 부총리는 지난달 18일 KBS '일요진단 라이브'에서 "지난해 9~10월에 (라면 판매 기업들이 가격을)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 내렸다"며 "기업들이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정부의 라면 가격 인하 압박에 지난달 27일 농심과 삼양식품에 이어, 같은 달 28일 오뚜기와 팔도가 라면값을 내리기로 하면서 라면 제조사 '빅4' 모두 가격을 인하했다. 국내 라면 업계 1위 농심은 자사 대표상품인 신라면을 4.5%, 팔도는 11개 제품 가격을 5.1% 각각 내렸다. 오뚜기는 면류 15개 제품 가격을 5%, 삼양식품은 삼양라면 등 12개 제품 가격을 평균 4.7% 각각 인하했다. 다만 라면 가격 인하 폭이 개당 약 50원에 그치면서 가격 인하 체감도는 비교적 낮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라면 제조사들은 불닭볶음면(삼양식품), 진라면(오뚜기), 비빔면(팔도) 등 주력 제품 가격은 유지해 소비자들의 체감 물가는 더욱 미미할 것으로 분석된다. 라면업계에 이어 밀가루를 주요 원재료로 사용하는 제과·제빵업계, 편의점 등 유통업계도 일제히 가격 인하 행렬에 동참했다. 롯데웰푸드, 해태제과, SPC 등은 주요 품목들의 판매가격을 5~10%까지 내렸다. 파리바게뜨는 식빵·바게트를 포함한 총 10종을 100∼200원가량 낮추기로 했다. SPC삼립도 정통크림빵 등 총 20종을 100∼200원 인하한다. 최근 정부가 치솟는 물가를 잠재우기 위해 가격 인하 압박에 나서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정부가 대내외 경기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과도하게 시장에 개입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기업 담합이 아닌 이상 인위적으로 정부가 물가를 잡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추 부총리가 '현재 국제 밀 가격이 지난해 9~10월 대비 50% 안팎 내렸다'는 이유로 라면 가격 인하를 언급했지만, 국제 밀 가격의 경우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5~2019년(1t당 160~180달러)에 비하면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는 인위적인 시장 개입보다 통화 정책 등을 통해 대응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홍우형 동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해 "한마디로 과도하다. 이게 선례를 남기면 굉장히 나쁜 것"이라며 "시장의 작동 원리를 무시하고 정부가 자꾸 개입하게 되면 분명히 시장의 안 보이는 곳에서 왜곡이 나타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등 영향으로 유동성을 키워놨기 때문에 전반적인 물가가 오르는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유동성을 잡고 물가를 잡기 위한 정책"이라며 "시장에 개입하지 않으면서 물가를 잡으려면 고이자율 정책과 긴축 재정 등으로 시중에 풀린 유동성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