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1천여 항일투사 양성한 동흥中, 왜 11人만 기록했나?
매일일보 = 최대억 기자 | 내주 화요일이면 나라가 광복이 된 지 78주년이 되는 날이다.
엄밀히 따지면 쇼와 덴노가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을 선언한 시점이 음력으론 1945년 7월 8일(양력8월 15일) 정오가 되므로 양력(365일)과 음력(354일)의 1년 날짜 수 차이를 보완하기 위해 존재하는 윤달을 대입하면 올해 광복 기념일은 오는 23일이 대중 맞다.
이즈음 일제의 식민약탈과 동족상잔(同族相殘) 등을 거친 광복을 떠올리자니 기쁨보다 가련한 선열들이 오브랩 된단다.
더구나 필자로서는, 그 시절 이해되지 않는 암살로 세상을 등진 여러 사연을 대륙 현지에서 꽤 접한 바, 오늘 오랜 세월 묵혀놨던 책 중 한권을 다시금 펴본다.
빼앗긴 나라를 떠나 우리 민족의 아픔과 한이 응결됐던 중국 간도 용정(龍井).
1921년, 이곳은 반일운동에 종사하던 우리 민족 인사들에 의해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가 세워졌고,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된다. 학생 수가 많을 때는 1천 여 명이라 추산하더라.
필자는 2015년 2월 20일, 당시 동흥중 교사였던 故박00의 친손자로부터 핸드북 크기의 혼치 않은 책자를 받았다. 붉은 색상의 책 표지에는 '東興中學(동흥중학)'과 '革命英烈(혁명영렬)'이 한어(漢語)로 쓰여 있었고, 책 속엔 11명의 ‘조선항일투사’들의 삶이 적혀있었다.
마지막 쪽 '校歌-교가(東興-동흥)' 글자 밑에 유일하게 한글(가로줄)로 교가 가삿말이 있었다.
"모아뫼 앞에 바위같은 터 높고 넓은 우리들의 집이라 무궁화 붉고 힌뫼 높아 둥그려한 우리들의 얼이라(이하 생략)"
실존했던 이들 일부는 본명이었고 대부분 가명이라 기록, 전부 1930년대에 ‘암살’ 또는 ‘행방불명’이라 적혔다. 3명만 인물 사진이 실렸다. 기록대로라면, 광복 훨씬 전에 약관(弱冠)·이립(而立)을 넘긴 꽃다운 나이에 국적없이 생을 마감한 것이다.
항일 공적과 함께 △박봉남 1936년 29세 사망 △허상범 1936년 32세 사망 △김일환 1934년 32세 사망 △허호림 1934년 31세 사망 △이용옥 1933년 29세 △오빈 1933년 29세 사망 △고하경 1935년 29세 △박윤단 1931년 36세 사망 △채주항 1931년 26세 사망 △조기세 1932년 27세 사망 △이동광 1937년 36세 사망이라고 쓰였다. 이 중 허상범은 유일한 기자였으며 1932년 이후부터 (사망 외)행적 기록이 없었다. 동흥중은 훗날 이들을 기리기 위해 이 책자를 공식 발행, 표지 빼고 총36쪽이었다. 그토록 많은 독립투사를 양성했다던 동흥중이 왜 11명만 기록, 후대에 전하는지 필자는 궁금했다.
그는 “아버지 유품인데, (필자의 물음에)그건 나도 모른다. 친 조부(祖父) 형제 셋 모두 동경대 출신, 처음엔 다들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이념을 달리한 형제 2명이 만주국 건국에 동참, 그때 조부는 동흥중 교직을 내려놓고 용정을 떠났다. 한때 독립운동가 후손이라 자부했는데 (조부의 동생 등으로 인해)떳떳할 순 없더라. 한국은 특정 친일파 후손들이 떵떵거리며 잘사는 모습 보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라. 그런데 이젠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찌됐던 그 자손들이 남아 조국 반쪽(한국)을 지켰기에...우린(조선족은) 고아 아닌가. 미국 원정 출산해서 美국적 선호하듯 중국도 그런 (잘사는)날이 와야 중국내 민족 이탈과 분열에 위협 안느끼고 (중국이)남북 화합에 방해하지 않을 터이니...분단된 조국(남·북)으로 인해 (조)부모 세대의 맺힌 한(恨), 남북 모두 보란 듯이 잘사는 것이 일본에 복수하는 참된 길이다”며 회신을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