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범 칼럼]농지개혁과 이승만 '대한민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

2023-08-14     기고
버네이즈

매일일보 = 기고  |  언론계에서 퇴직한 중학교 선배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중년 시절 바람을 피웠고, 그 일로 인해 딸은 아버지를 완전히 경멸하게 되었다. 그의 일생은 가족을 위한 헌신으로 가득 찼지만, 이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나중의 삶이 참으로 비참해졌다. 딸은 아빠 덕분에 명문대를 졸업하고 전문직으로 잘 성장했지만, 그 실수는 결국 가족 간의 관계에 영구한 상처를 남겼다.

현재 우리나라의 풍요와 발전은 기적에 가깝다. 진부한 얘기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한 국가다. 6·25 전쟁에 참전했던 외국 용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시간을 더 돌려 구한말의 조선인을 살펴보면, 가난과 무지로 인해 미래가 거의 없는 상태였다. 구한말 조선의 문맹률은 90%에 달했다. 외국인들은 조선인의 게으르고 비위생적인 모습에 놀랐다. 아낙네들은 젖가슴을 내놓고 활보했으며, 거리에는 오물이 넘쳐났다. 서양인의 눈에 미개해 보이는 조선인의 사진들이 지금도 인터넷에 넘쳐나고 있다. 현재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보이는 비참한 광경은 불과 100년 전까지 이 땅에서 있었던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면서 동시에 가장 민주화된 나라로 성장했다. 소프트파워 측면에서 한국은 가장 매력적인 나라 중 하나로 여겨진다. 한류는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며, 유일한 경쟁자는 미국의 할리우드 정도다. 수많은 지구촌 젊은이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글을 배우고 있다. 일제에게 나라도 빼앗기고 동족 상잔의 비극도 겪은 대한민국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대한민국의 번영은 필연적인 역사적 순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영원히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2등 국민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 될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해방 후 한반도는 공산화 위기에 직면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세계 최대의 공산주의자들인 중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이미 북한은 소련군이 진격해 점령하고 김일성을 내세워 공산주의 국가를 세웠다. 남한은 최빈국 상태였고,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백주 대낮에 활보했고, 남노당이 건설되어 사실상 공산화가 기정사실화된 것처럼 보였다. 남한 인구의 77%를 차지하는 농민은 '지주를 때려잡고 농민이 주인이 되는' 공산주의 사상에 푹 빠져들었다. 1945년 남한 전체 농가의 86%가 소작농이었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 후 토지 조사를 한 정부 관료는 "6명의 대지주가 전국 땅을 좌지우지하고, 나머지는 사찰 땅이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중국 공산당과 북조선에서는 이미 '무상 몰수, 무상 분배'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죽하면 6.25 당시 북한 부수상이었던 박헌영은 "며칠 내로 대한민국의 농민과 좌익 세력이 북한군에 호응해 폭동을 일으켜 줄 것"이라고 호언 장담했을까. 김일성은 남침 당시 전쟁 승리를 100%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았다. 북에는 '적토마를 타고 온 김일성'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백마를 타고 온 초인'이 있었다. 그는 구한말 일제에 맞서다 사형 선고를 받고 대한제국의 밀사로 도미한 이승만 박사였다. 이승만 박사는 어려서부터 천재였으며, 단 5년 만에 미국의 명문 대학인 조지 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1941년 여름 뉴욕에서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했고,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감행했다. 당연히 예언서가 된 '일본 내막기'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승만 박사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했다. 이 책은 미국 지식인들에게 '조선'이란 나라를 사실상 처음으로 알렸다. 2년 뒤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자주 독립'을 담은 카이로 선언이 나오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일본 내막기' 덕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뼈속까지 반공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유상 몰수, 유상 분배'라는 농지개혁을 실행했다. 지주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해 소작농에게 분배하는 것은 자본주의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에서 전향한 죽산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하며 농지개혁을 밀어부쳤다. 말이 '유상 몰수, 유상 분배'지만 사실상 지주에게 땅을 강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농지개혁법이 1950년 5월에 마무리되었고, 소작농들은 꿈에 그리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바로 뒤에 6.25 전쟁이 터졌지만 농민들은 대한민국을 배신하지 않았다. 공산화되면 소련처럼 결국 집단 농장화되어 소작농보다 못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말 한국 전체 경지 면적의 35%에 불과했던 자작농지가 1951년 말에는 96%로 치솟았다. 1950년 8월, 이승만 박사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카투사 제도를 맥아더 장군에게 제안했다. 농지개혁이 없었다면 이 제도는 절대 실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농민의 아들, 즉 카투사들이 미군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대한민국을 위한 헌신이었다. 남한과 유사한 경우로는 남베트남(월남)이 대표적이다. 아시아 농지개혁의 아버지라고 칭송받는 울프 라데진스키는 일본과 대만에 이어 남베트남에서도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알려진 응오딘지엠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은 지주들의 반발로 농지개혁에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의 소작농들은 북베트남을 지지하게 되어 공산화의 길을 걸었다. 빌 게이츠가 극찬한 조 스터드웰의 저서 '아시아의 힘(How Asia Works)'에서는 대한민국의 번영이 '이승만의 농지개혁'에서 시작됐다고 단언했다. 역사적으로 가정을 세우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만, 독립 투사들의 항일 투쟁과 이승만 박사의 '일본 내막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영원히 일본의 2등 국민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승만 박사의 농지개혁법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현재 우리는 김정은 위원장을 추앙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장면에 이승만 박사가 있었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로 하야했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렇다고 그의 뛰어난 업적들을 무시하고 비판만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이승만 박사 기념관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 7월 15일 이승만 농지개혁을 대한민국 발전의 결정적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만시지탄이긴 하지만, 이는 다행이라고 느낀다. 또한, 불륜을 저지른 선배의 딸에게도 말하고 싶다. 그런 실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자신을 어떻게 성장시켰는지를 생각하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첨언하자면 아직도 일본 극우 정치인들은 일제 식민지 통치가 오늘의 대한민국 번영을 이뤘다는 망언을 하고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한국인의 문맹률은 80%에 달했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문맹률은 고작 10%만 떨어졌을 뿐이다. 반면에 1959년 한국인의 문맹률은 10%로 비약적으로 떨어졌다.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쉽게 알 수 있고, 이승만 정부가 얼마나 국민에게 진심이었는지 증명한다. 일본은 조선인을 단지 노예 취급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