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3대 걸친 숙청史…‘1인 권력’ 희생양들
‘경쟁자=간첩’ 내몰고 문제되면 실무자에 책임전가
2014-12-10 인터넷뉴스팀
일성, 수차례 ‘전쟁’으로 모두 숙청
북한 정권의 ‘시조’인 김일성 주석은 1인 지배체제 확립을 위해 수차례의 ‘전쟁’을 통해 정치적 경쟁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해방 직후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조선공산당을 설립한 김 주석은 1949년 6월 중국에서 활동했던 ‘연안파’ 중심의 조선신민당, 남로당 등을 통합해 조선노동당을 창설하고 당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노동당의 1인자가 됐지만, 지지기반이 약했던 김 주석은 1인 지배체제 확립에 반대하는 각 계파를 단번에 숙청하지 않고 하나씩 제거했다. 김 주석은 우선 6·25 남침 실패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1955년까지 박헌영·이승엽 등 남로당 계열 간부들을 ‘미제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남로당 계열 제거에 앞장섰던 인물은 ‘소련파’ 박창옥 전 내각 부수상이다. 그는 김 주석을 위해 같은 계파인 허가이 숙청에도 관여했다.하지만 박창옥은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파와 손잡고 김 주석의 독주에 정면으로 도전하다가 ‘반당 종파분자’로 낙인찍혀 ‘토사구팽’ 당했다.
이후 김 주석은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를 계기로 연안파와 소련파는 물론 오기섭 등 국내파까지 모조리 제거했다.
정일, ‘간첩단 사건’까지 조작
1970년대 들어 1인 지배체제를 확고히 한 김 주석은 아들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권력을 차례차례 넘겨줬다. 김 위원장은 당시 김 주석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자신의 삼촌 김영주 전 노동당 조직비서는 물론 최대 정적이었던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김평일 등과의 ‘충성경쟁’에서 승리하면서 김 주석으로부터 후계자로 낙점 받았다.결국 김 위원장은 1973년 9월 30대 초반의 나이에 노동당 조직 및 선전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에 오르면서 당권을 장악했으며 이듬해 2월 당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는 김 위원장을 후계자로 추대하는 ‘결정서’가 채택됐다.특히 김평일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계모 김성애와 그 자녀를 ‘곁가지’로 규정하고 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광범위한 숙청작업을 단행했다. 김성애와 그 자녀와 세력에 대한 제거는 김정일 일인지배 체제에서 단행한 최대 숙청작업이었다.또 김 위원장은 자신의 경쟁자였던 김영주를 자강도로 추방했으며 김영주를 추종했던 김동규 전 부주석과 류장식 전 대남비서 등을 숙청했다.김정일 체제에서 이뤄진 두 번째 숙청작업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 후 1997년께 사회안전부 정치국장 채문덕을 내세워 ‘심화조사건’이라는 대형 간첩단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수많은 아사자를 낳은 ‘고난의 행군’으로 민심이 흔들리고 사회 전반에 불안정이 초래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차원의 숙청작업으로 알려졌다.당시 서관히 전 노동당 농업담당비서, 서윤석 전 평양시당 책임비서와 문성술 본부당 책임비서, 김만금 전 부주석 등 김일성 시대의 인물들에게 무더기로 ‘간첩’ 누명이 씌워졌다.하지만 이 사건 이후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김 위원장은 심화조사건 총책이었던 채문덕을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고 심화조사건 피해자들을 복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