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을사늑약 체결, 대한제국 외교권이 사라진 치욕의 날
2024-11-17 조우주 前 국방정신전력원 전문연구원
매일일보 | 1904년 2월,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일대 지배를 목적으로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직후,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고종 황제에게 일본에 협력할 것을 강요했다. 결국, 2월 23일 일제는 대한제국과 ‘대한제국 황실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필요한 조치를 행한다’라는 내용이 포함된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다.
일제는 한일의정서를 근거로 ‘대한방침’ 및 ‘대한시설강령’ 등을 제정했다. 대한제국 침략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같은 해 8월에는 조선과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재정, 외교 등을 감시하고 장악하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반도 주변 열강들과 협의를 통해 전후 문제를 처리하고자 했다. 일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개정’ 등을 통해 열강들로부터 대한제국 지배권을 인정받으며 조선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1905년 10월, 일제는 각료회의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 초안을 작성하고 대한제국 지배를 위한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이후, 하야시 공사는 조약 체결의 전권 대표로, 이토 히로부미는 천황의 칙사로 결정됐다. 11월 9일, 경성에 도착한 이토는 다음날 고종을 만나 천황의 친서를 전하며 압박을 가했다. 친서의 내용은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대사를 특파하오니 대사의 지휘를 따라 조치하라”라는 것이었다. 11월 15일에는 고종에게 을사늑약 원안을 제시하고 승인을 강요했다. 하지만 고종은 “대한제국 대신들과 의논해 조처하라”라며 조약 체결을 거부했다. 11월 17일, 경운궁(現 덕수궁) 중명전에서 조약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일본군은 무장한 채 궁궐을 포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참정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조약을 반대했다.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해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조약에 찬성했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었고, 고종의 재가 없이 외부대신 관인을 가져와 조약문에 날인했다. 을사늑약은 총 5개조로 구성됐다. 그 내용은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동경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금후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리 및 지휘하며, 일본국 외교 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있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하는 책임을 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에 1인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경성에 주재하고 직접 한국 황제 폐하를 궁중에 알현하는 권리를 가진다. (중략)’, 등이었다. 고종의 비준 없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을 통해 일제는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했다. 11월 20일부터 일제는 을사늑약이 조인된 사실을 영국, 미국 등 각국에 통보해 외국에 설치된 대한제국 공사관과 대한제국 주재 각국 공사관을 철폐해 줄 것을 요구했다. 1906년에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해 대한제국 내정을 장악하려 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각계각층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비밀리에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황실 고문 호머 헐버트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한일 양국 간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라는 전문을 보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미국에 전달해 줄 것을 통보했다. 국내 언론은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각지로 전하며 항일투쟁을 선도했다. 당시 언론기관은 일제에 검열당하고 있었는데, 『황성신문』은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또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狂哭), 이 날에 목 놓아 크게 통곡함)」이라는 논설을 게재해 을사오적을 규탄하고 전 국민의 분노를 호소했다. 을사늑약 반대 운동이 점차 치열해져 가는 가운데, 시종무관 민영환과 원로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불의에 항거하기 위한 최후 방안으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전국 각지에서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수많은 항거 활동이 이어졌지만, 대한제국의 운명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후 5년 뒤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됐다. 11월 17일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자 ‘순국선열의 날’이기도 하다. 이날은 1939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제31회 의정원 임시총회에서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처음 제정했다. 이는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와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들의 노력을 기억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1997년부터 매년 국가보훈처 주관 기념식이 진행돼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며 국민의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있다. 조우주 前 국방정신전력원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