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중대재해처벌법, "처음부터 잘 만들었어야지"

2023-11-21     안광석 기자
안광석

매일일보 = 안광석 기자  |  어떤 목적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과거 취재수첩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휴대폰으로 메모를 빨리 저장하는 게 익숙지 않았다 보니 20여권이 넘는 손때 묻은 수첩에 수기가 공란 없이 빼곡하다. 어떠한 취재건이었는지, 무슨 상황이었는지 복기는커녕 무슨 글씨인지 알아보기도 어렵다.

그래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나마 제일 많이 눈에 띄고 알아보기 쉬운 문구가 ‘우리 소관이 아니다’다. 산업현장 사건사고를 다루다 보면 취재원들에게 실제로 자주 듣는 표현이다.

사연 없는 무덤이 있겠나. 그럼에도 고밀도 아파트에 화재가 번지고 있는데 우리 세대에서 발생한 게 아니니 나랑 상관 없다고 선긋다 어느 순간 타죽는 꼴이라는 다소 과격한 주제로 기사를 작성한 기억도 난다.

중대재해처벌법 50인 미만 사업장 확대 적용을 두달여 앞두고 해묵은 실효성 논란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해 1월 27일부터 시행된 중대재해법의 골자는 근로자 사망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실효성 논란이 자꾸 나오는 것은 이후에도 중대재해가 적용되는 사업장에 사건사고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경영책임자에 대한 기준 내지 경계를 애매하게 규정해놔 돈 있는 기업들은 비싼 변호사들의 법률자문을 받아 기존처럼 ‘우리 소관이 아니다’라며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

당연히 사업장 안전·보건 기준을 확립하고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해놓은 기존 산업안전보건법과의 차별성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중대재해법이 시행된지 겨우 2년 남짓이다.

어차피 중대재해법의 존재가치가 결정되는 척도는 ‘누구 소관인가’를 입증하는 것이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똑같은 산업현장 사망사고일지라도 사업장 환경과 사건전후상황, 담당경찰조사 등 여러 변수에 따라 중대재해 입증 결과는 무수한 경우의 수로 귀결된다.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사업장만 해도 건설을 비롯해 조선·철강·화학 등 다양하다. 그 다양한 사업장 중 한 곳에서도 파트별로 책임지는 주체도 다를 수 있다. 그나마도 상당수 사건사고는 증거 및 시간, 자금 부족으로 법정조차 가지 못한다. 법적 해석에 도움이 될 판례가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다.

이러한 이유에서 개인적으로 법의 실효성을 따지기에는 여전히 시기상조라고 본다.

현 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애초 법을 만들 때 졸속으로 진행하면 실효성 논란 같은 이슈가 추후 반드시 발생한다는 점이다. 건설 분야 한 곳에서도 중대재해 이면에는 불법하도급과 전관예우 관행 등이 또아리를 틀고 있기 마련이다.

꼭 중대재해법이 아니더라도 관련 법 하나 만들기 전에 현상의 근본원인을 찾아 현장을 충분히 둘러보면서 한명이라도 더 많은 근로자들과, 공청회 한 번이라도 더 열어 최대한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는 의미다.

마침 총선이 반년도 남지 않은 상황이다. 사후약방문이 됐지만, 뒤이을 중대재해법 개정안은 정말 중대재해를 근절하려는 이해관계자들의 심사숙고가 담겨 있어야 한다. 김포시 서울 편입 및 공매도 금지 등에서 풍긴 졸속법안의 냄새가 인명이 걸려 있는 중대재해법에서까지 나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