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김종혁 기자 |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은 없고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라는 태도로 여러 정치적·사회적 위기를 초래했다. 이른바 ‘탈진실’의 시대, 우리는 포퓰리즘의 선동과 온갖 음모론에 둘러싸여 있다.
1980년생 젊은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할 돌파구를 새로운 실재론에서 찾는다. “새로운 계몽”을 수행할 실천적 사유, 인식에 밀려 철학에서 배제되었던 존재를 다시 이야기하는 철학, 바로 ‘신실재론’이다.
가브리엘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형이상학적 ‘세계’ 개념을 과감히 폐기해 구실재론의 한계를 넘어선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각기 다른 맥락과 배경, 즉 ‘의미장’에 나타나는 것이다.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들뿐 아니라 상상이나 픽션의 의미장에 나타나는 외계 생명체, 일각수, 마녀도 엄연히 실재한다.
신실재론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 매겨진 위계를 무너뜨리고 존재론적 다원주의의 장을 연다. 이로써 우리는 두뇌의 물리ᐨ화학적 작용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자연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도덕적 가치, 실재로서 예술의 창작과 해석 과정을 적극 논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상식과 익숙한 철학적 관점을 뒤흔드는 가브리엘의 사유를 열 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의미장 존재론”, “존재론적 기술주의” 등 가브리엘 신실재론의 핵심 테제를 살피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도발적 주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의미장 존재론이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과 어떤 면에서 같고 다른지 비교 고찰하기도 한다. 이 시대 중요한 철학적 논제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 1980∼ )은
동시대를 지배하는 회의주의와 구성주의에 맞서 새로운 철학적 기반을 갖춘 실재론을 제안한 독일 철학자다. 독일 본대학교 인식론·근현대철학 담당 교수로, 2009년 28세에 독일 역사상 최연소 교수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도덕적 상대주의와 포퓰리즘, 탈진실 등 우리 시대가 직면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과 대결하는 철학적 실천이 오늘날 철학의 주요한 임무라고 여긴다. 신실재론의 기본 프로그램을 제시한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인간의 마음을 뇌의 전기·화학적 작동으로 설명하려는 신경중심주의를 비판한 ≪나는 뇌가 아니다≫ 등 철학적 논의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저서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지은이 김남시는 2013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에서 문화이론 및 미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서울대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한 후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문화학과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예술의 힘≫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 외에 발터 베냐민의 ≪모스크바 일기≫,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축음기, 영화, 타자기≫(공역), 아비 바르부르크의 ≪뱀 의식≫,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과거의 문턱≫ 등을 번역했다. 동시대 철학, 미학적 논의와 예술적 실천에 관심을 두고 비평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