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고도를 기다리며

2025-04-15     조석근 기자
조석근
꽤 오래 전 신입사원 압박 면접에서 유행했던 질문이다. 남극의 펭귄들에게 냉장고를 판매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발상을 살짝 비틀자. 기상 탓에 꽁꽁 얼어붙은 음식(주로 생선)을 해동하는 온장고로 홍보하자. 또는 장기간 숙성을 위한 김치냉장고 정도로. 냉장고를 구입하는 펭귄에게 포인트를 넉넉히 지급하자. 다른 고객을 데려온 펭귄 고객은 영업헤드로 간주하자. 이들에게 누적 포인트를 추가 지급하고 다이아몬드, 골드, 실버 등급을 부여하자. 다이아몬드 펭귄은 억대 연봉이 가능하다고 입소문도 내자. 네트워크 마케팅과 바이럴 마케팅이 남극에서 불법은 아닐 것이다. 다함께 성공할 수 있다고, 아주 당당하게 홍보하자. 이번에는 남극에서 국회의원 총선이 벌어진다고 가정해보자. 표를 구하는 일은 물건을 파는 일과 차원이 다르다. 상품이든 서비스든 실물로 제공할 수 있는 게 없다. 오로지 믿음으로 호소하는 수밖에···. OO당을 믿고 상대당을 심판해달라, 대통령과 여당의 프리미엄을 주목하라, 또는 후보의 눈부신 이력을 믿고 찍어달라고 90도 인사는 기본. 필요하면 무릎이 까질 때까지 삼보일배도 해야 한다. 펭귄들은 늘 배고프다. 대부분의 펭귄은 그저 후보를 스쳐지나간다. 더구나 특정 정당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에서 상대당 후보로 나서는 일은 비웃음마저 감수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오랜 기간을 말이다. 선거는 마케팅에서도 최고 난이도의 영역이다. 세스 고딘은 그것을 유권자들의 '세계관'에 호소하는 일이라고 부른다. 보수가 지배적인 집단에 진보의 세계관을 호소하는 것. 또는 그 역의 작업을 문학적으로 비유하면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다.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기다림의 처절함에 대한 희극이다. 기다림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다림. 어제와 오늘을 헷갈리게, 방금 일어난 일조차 어제 벌어진 일인지 내일 벌어질 일인지 구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잔혹한 희망고문이 바로 기다림의 실체다. 그래도 기다린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자에게 삶은 가혹하다. 눈물을 머금고 기다리지만 그럴수록 관객들은 코미디로 취급할 뿐이다. 이 부조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선거를 포기해야 한다. 22대 총선 결과, 부산 18개 지역구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조리 낙선했다. 21대 총선 3석보다 오히려 더 줄었다. 부산, 울산, 경남 즉 PK 대표 지역 부산의 민주당 후보 지지율은 그럼에도 평균 45%. 여기까지 오도록,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좌절과 희망이 켜켜이 쌓였다. 국민의힘이 크게 패배한 선거지만 개별 지역구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들이 쌓였다. 서울 도봉갑은 민주당의 상징적인 지역구다. 지역 주민들과 친밀한 30대의 씩씩한 아빠가 국민의힘 후보로 당선증을 얻었다. 유권자들이 상대당 후보보다 조금은 더 인정했다는 뜻이다. 이런 간절한 기다림을 두고 정치 혐오? 살면서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 조금이라도 뜨거웠던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감정이다. 혹은 정치에 대한 막연한 무지이거나. 이번 총선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많은 후보들이 속히 기운을 차리시길 기원한다. 23대 총선, 생각보다 얼마 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