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 출전 명단은 그 한명 한명의 면면이 살벌했다. 마크 오베르마스, 에드가 다비즈,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에드윈 판 데르 사르, 필립 코쿠로 이어지는 당대 유럽 최강의 공격 라인, 그 정점은 전성기의 데니스 베르캄프다. 축구 팬들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는 이름이다. 그럼 감독은 누구? 거스 히딩크.
네덜란드는 그 이전까지 두 번, 월드컵을 준우승했다. 애초 월드컵 우승이 목표였던 팀이다. 황금세대로 불릴 만큼 역대 최강 전력을 자랑한 네덜란드를 두고 월드컵 첫 승리, 즉 그때까지 한 번도 못해본 '1승'의 제물로 바치겠다는 패기 넘치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대한민국이다.
해외축구에는 도통 관심이 없던 시절이다. 브라질, 이탈리아, 독일 말고는 다 고만고만하다고들 생각했다. 한국은 선후배로 똘똘 뭉친 조직력과 정신력, 특히 강렬한 투지가 강점이다, 공은 둥글다고 축구 해설가들, 스포츠 언론은 시종일관 떠들어댔다.
네덜란드전 결과는 5:0. 월드컵 첫 승리는커녕 전국민이 온 세계에 '축알못'으로 제대로 망신당한 그날, 광화문에 모인 수천명 붉은 악마들은 밤새도록 슬피 울었다.
4·10 총선이 끝나고 10여일이 지나서 언론을 통해 전달된 대통령의 한 마디가 화제였다. "이제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것. 그 한 마디가 총선 패배의 많은 것들을 설명한다. 그 말을 뒤집으면 대통령실은 지난 2년간 정치를 한 적이 없다고 털어놓은 셈이다.
그런 대통령실의 가장 중요한 국정 파트너인 여당은? 여당은 지금 총선 패배를 수습할 3주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전당대회 전 단기간 임시 대표 역할을 해줄 비대위원장조차 선뜻 맡으려는 사람이 없다. 정계를 떠난 황우여 전 대표가 결국 돌아왔다. 정치인들이 정치를 기피한다. 참 희한한 풍경이다.
정부와 여당은 총선 직전까지 심판 여론쯤은 무시했다. 여론조사마다 대통령 국정수행 긍정평가가 2년 가까이 30%대를 기록했다. 부정평가는 60% 안팎이다. 야당의 공천파동으로 인한 여론 악화를 일시적이긴커녕 마치 늘 그랬던 상수라고 판단했다.
그 결과 여당의 공천, 메시지, 선거전, 위기관리로 이어진 총선전략은 그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이지 않았다. 여당으로서 최악의 참패를 기록한 성적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다. 국가 행정 전체를 책임질 대통령과 그 미래 비전을 뒷받침할 여당의 존재감이 크게 소실된 것이다. 그럼에도 개헌저지선은 막았으니 '석패'한 것이란 주장이 당내에서 나온다. '정알못'인가.
대통령이 정치를 하겠다고 하니 대통령실과 여당은 기왕이면 히딩크를 참고하자. 한국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된 히딩크의 진단은 국내 축구계 상식과 정반대였다. 한국팀은 그때까지 강점이라던 조직력, 정신력, 특히 투지가 사실은 가장 취약했다. 특유의 팀내 서열 문화를 깨부수고 체력, 기본기부터 다진 결과가 2002년의 전설이다.
야당과의 대화는 기왕 시작했으니까 좋다. 영수회담이 이후로도 대화를 이어갈 계기로 작용하길 기대한다. 여당과 대통령실은 정치 실종의 근본 원인인 수직적 구조를 어떻게 개편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대통령 본인은 물론 여당까지 위기로 몰아넣은 특검 요구에 대해서도 전향적 입장이 필요하다. 총선이 드러낸 가장 근본적인 약점부터 극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