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계(玉溪) 유진산 총재 서거 50주기 추도식 개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대부를 기리는 추도식(追悼式.)... 추모(追募) 음악회 열려
매일일보 = 김진홍 기자 | 옥계(玉溪) 유진산 총재 50주기 추도식 및 음악회가 지난 28일 오전 10시 충남 금산군 진산면 진산초등학교 진산관(간당)에서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추도식은 옥계 유진산 선생 관련 동영상을 시청한 후 공식 행사를 시작했다. 옥계 유진산 선생 선양회 박기우 회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박범인 금산군수,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 회장, 옥계 선생의 4남 유한열 전)의원이 유가족 대표로 감사의 말씀을 전하는 순서로 진행했다.
박범인 금산군수는 “민주 정치의 디딤돌인 유진산 선생은 정치에서 타협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는 그의 정치적 신념과도 같았다. 며, 강력한 투쟁이 아닌 타협을 우선으로 하는 태도 때문에 지탄을 받은 적도 있었지만 더 좋은 결과를 거둔적도 적지 않았다.” 고 술회 했다.
이어 “5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대화와 타협은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그의 헌신에 감사를 표하며, 끝없는 존경을 바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헌정회 정대철 회장은 “유진산 선생은 △조국 광복을 위해 항일독립 운동을 펴신분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을 펼치신 분 △이나라 대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대화와 타협 조정의 정치를 펼치신 분 △따뜻한 인간미가 있으신 분으로 청빈한 생활을 사셨던 분이라며 네가지 이유로 흠모하고 존경한다”고 추도했다.
옥계 유진산선생은 1905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태어났다.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2학년 재학당시 교내 ‘독립만세’ 벽보 사건으로 자퇴를 강요받아 자퇴 후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1926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제1고등학원에 입학 하였고, 1928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3학년 재학 중 독서회 사건으로 이치가야 형무소에 투옥되어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932년 귀국하여 쌍엽농민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았다.
1933년에 농민운동으로 일본경찰 감시가 심해져 중국으로 망명해,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한인회를 조직하고, 충칭(重慶) 임시정부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1년 뒤 1934년 일본 관헌에 붙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35년에는 농민독본(農民讀本)의 편집을 하면서 필명을(眞山), 나중에 (珍山)으로 고쳐 광복 운동을 펼쳤다.
1945년 금산에서 제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제4대, 제5대, 제6대 민의원, 제7대 영등포에서 당선됐다. 1970년 신민당 당수에 오르며 1971년 신민당 후보로 전국구 제8대 의원에 당선됐고, 1973년 금산에서 제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7선 의원의 거물 정치인이 됐다.
금산=김진홍 기자 yjk19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