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충청도 사투리의 힘

2025-05-15     장이랑 작가
장이랑

매일일보  |  한글박물관에서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기획특별전 <사투리는 못 참지>가 전시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재밌것슈. 기대돼유”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서울에서 꽤 오래 살았기에 대놓고 티를 낼 기회가 없었을 뿐 내 유전자엔 충청도 사투리가 깊게 새겨져 있다. 원적이 충청도인 데다 어린 시절 충청도 토박이인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컸기에.  지난해 출간한 청소년 소설 <계란떡만두햄치즈김치라면>에도 충청도 사투리가 자주 등장한다. 작정하고 쓴 게 아니라 쓰다 보니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내게 충청도 사투리는 일종의 향수, 그리움, 정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내 바쁜 일상에 스크래치를 내지 않도록 억지로 수면 아래로 가둬두었던. 아무튼 들을수록 정겨운 충청도 사투리의 특징은 우선 어미를 길고 느릿하게 빼거나, ‘뭐여’, ‘겨, 아녀’, ‘그류’처럼 모음이 걸쭉하고 구수하게 변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경우, 특유의 어조 때문에 웃음이 나거나 답답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못 알아듣는 일은 거의 없다. 

‘대체 뭔 소리여?’ 하고 물음표가 뜨는 건 두 가지 경우다. 첫째, 아주 생소한 사투리 단어를 썼을 때. 둘째, 충청도식 은유 화법을 구사했을 때. 
 
첫 직장에서 동료와 경사진 산동네를 오르며 나도 모르게 “와, 날맹이 진짜 힘드네”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동료가 한참 동안이나 땅바닥을 내려다본 일은 떠올릴 때마다 웃기다. 동료는 날맹이(산봉우리)를 돌멩이로 잘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내 발치에 돌멩이가 있는지부터 부지런히 살폈던 거고. 

병원에서 일화도 있다. 부정맥 증상을 염려하는 언니를 데리고 서울 모 병원의 심혈관센터에 갔을 때다. 의사선생님이 언니더러 “집에서 어지럽거나 두근거릴 땐 어떻게 처치해요?”라고 묻자 언니가 진지한 얼굴로 “일단 둔눠요”라고 답했다. 둔누다는 드러눕는다는 뜻이다.  바로 그때, 고개를 갸웃거리며 “네에?” 하고 되묻는 의사선생님이 표정이 재미있어 나는 속으로 빵 터졌다. 거리낌 없이 웃을 상황은 아닌지라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참고 있는데 어디서 끅끅 하고 흐느끼듯 웃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 웃음을 잘 참지 못하는 언니의 웃음보가 터져 새어 나온 것이었다.  쓰르메(오징어), 대간하다(고단하다), 가이(개), 건건이(반찬), 저분(젓가락), 쩜매다(묶다) 등도 어렸을 때 자주 쓰던, 그러나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은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대표적인 충청도 사투리다. 뜻을 말해주면 “오호!” 하며 엄청 재미있어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충청도 사투리의 가장 큰 매력은 직접적으로 단번에 말하지 않고 약간 뜸을 들인 뒤 재치 있게 한 바퀴 빙글 돌려 말하는 데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충청도식 은유 화법이다. 우회적이지만 결코 냉소적인 돌려까기가 아닌, 유머와 정이 담긴 소박한 넋두리에 가깝달까.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소년시대>와 <힙하게>의 인기 비결도 이러한 충청도 사투리였다. 작가와 배우가 모두 충청도 찐 토박이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사투리를 제대로 맛깔나게 구사해 우리 부부를 데굴데굴 구르게 했다. 특히 <힙하게>에서 강력반장으로 나와 찰진 충청도식 화법을 구사한 김희원 배우는 어린 시절 친척 아재가 환생한 줄 착각할 정도였다.  “이틀 입은 빤스 같은 놈(찝찝한 놈이라는 뜻)”, “일이삼사오육칠팔구십이유(이제 위로 올라갈 일, 승진할 일만 남았다는 뜻)” 등 통역을 필요로 할 만큼 능란한 충청도 사투리를 내뱉는 장면은 가히 수상감이라고 느꼈다.  할 일이 산더미라 괜히 마음이 급해진 하루였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바쁠수록 충청도 화법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시간을 우회하는 것도 좋겠다 싶다. 세상 귀여운 충청도식 과속방지 스티커 문구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슈?”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