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환율 불안에 지연되는 금리인하...한은도 '진퇴양난'
역대 최장 동결..."금통위원 5명 3달 후에도 3.5% 유지 의견"
딜레마 빠진 한은...美와 유럽 엇박자 통화정책도 불확실성↑
2025-05-23 이광표 기자
매일일보 = 이광표 기자 | "올해 하반기 중 기준금리를 인하하더라도 그 시점에 대한 불확실성은 지난 4월에 비해 훨씬 커졌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3일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밝혔다. "하반기 중 금리 인하 기대가 있는데, 물가 상방 압력을 받고 있어서 시점이 불확실하다는 의미"라고도 덧붙였다.
금통위원들은 이날 전원일치 의견으로 금리를 3.5%로 동결했다. 1년 4개월째 동결로 최장 기간 금리 동결이다. 지난 사례를 살펴보면 1999년 콜금리 목표제 도입 이후 2009년 3월부터 2010년 6월까지, 2016년 7월부터 2017년 10월까지 1년 4개월간 금리를 동결한 바 있다.
이 총재는 본인을 제외한 금통위원 6명 중 1명이 3개월 후 금리 인하 가능성 열어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나머지 5명은 3개월 후에도 금리 동결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나타냈다고 공개했다. 한은이 이번에도 금리를 동결한 것은 국내 물가와 미국 통화정책을 둘러싼 안개가 오히려 짙어졌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달 2.9%를 기록하면서 한은의 안정 목표인 2%로 안착한다는 확신은 여전히 부족한 데다, 지난달 금통위 이후 중동 분쟁이 확산하며 국제 유가와 환율이 치솟고 수입 물가 경로를 통한 물가 자극 우려가 제기됐다. 게다가 미국의 경제 지표 호조로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정책금리 인하 예상 시점이 더욱 지연되고 있다.
지난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마저 1.3%라는 '서프라이즈'를 보이면서 금리 인하 명분을 흐리게 했다. 실제로 한은은 이날 금통위 의결 직후 발표한 5월 경제 전망에서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지난 2월보다 0.4%p 상향 조정한 2.5%로 제시했다.
이 총재는 향후 기준금리 인하 폭에 대해서는 금통위원 간에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금리 인하 시점을 확인하고 그다음 인하폭을 생각해야 할 텐데, 인하 시점의 불확실성이 커서 아직 거기까지 논의를 안 했다"고 말했다. 이어 "물가가 안정된다면 내수와 수출 간의 조화를 어떻게 할지, 금리를 너무 낮췄을 때 미래 금융안정을 어떻게 할지 등을 다 고려해 폭을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반대로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에 대해선 "물가가 확실히 오르면 인상을 고려해야겠지만, 현 상황에서 가능성이 제한되지 않나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미국 통화정책과의 탈동조화에 관한 질문에는 "미국의 통화정책이 변함에 따라 환율 시장과 자본 이동성이 주는 영향, 국내 시장에 미치는 영향 등을 보면서 하반기 통화정책을 해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앞서 지난달 12일 기자간담회에서 "미국이 피벗(정책 전환) 시그널을 작년 말부터 줬기 때문에 탈동조화는 이미 시작됐다고 본다"고 언급한 것의 연장선에서 나온 발언이다.
이 총재는 한은이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2.1%에서 2.5%로 높인 주요 배경으로 순수출 증가를 들었다.
그는 "글로벌 IT(정보기술) 경기 호조와 미국 경제 강한 성장세 등 대외 요인이 성장률 전망치를 0.3%포인트(p) 상향 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내수 부진 등 대내 요인은 0.1%p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성장률 전망치를 대폭 높이면서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유지한 이유에 대해서도 "성장률 상향 조정이 물가 영향이 크지 않은 순수출 증가에 상당 부분 기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주요국 통화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한은의 셈법도 더 복잡해질 전망이다. 미국의 고금리 기조가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는 가운데 유럽중앙은행은 다음 달 금리 인하에 나설 것을 시사하고 나섰다. 한은 입장에서는 경기 침체 등을 감안하면 금리 인하 시기를 정해야 하지만 주요국 통화정책의 불확실성이 또 다른 변수로 부상하는 분위기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21일(현지시간) 아일랜드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이 통제 단계에 이르렀다고 확신한다”며 “이 경로가 유지되면 다음 달 금리 인하에 나설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강조했다. 이는 최근 유로 지역의 물가 상승세가 2% 초중반으로 내린 가운데 경기 둔화 우려가 커지고 있는 만큼 미국보다 먼저 기준금리 인하에 나서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미국의 금리 인하 시기는 날로 미뤄지는 분위기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장은 지난 1일 기자들과 만나 “올해 들어 지금까지 경제 지표는 우리에게 (인플레이션이 2%로 향하고 있다는) 더 큰 확신을 주지 못했다”며 “더 큰 확신을 얻기까지 종전에 기대했던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연준은 이날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기준금리 목표 범위를 5.25∼5.50%로 동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