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롯데 자이언츠 팬들의 ‘아 주라!’ 정신

2025-07-18     조석근 기자
조석근
부산 출신들에게 롯데 자이언츠란? 영혼.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롯데 자이언츠를 향한 자부심은 때론 조국과 민족을 능가한다. 사직구장에서 그 홈팀 경기를 직관할 기회가 있다면? 공이 펜스를 넘는 순간을 주목하자. 홈런이든 파울이든 공이 관중석으로 날아가고 그 공을 잡으려고 팬들이 뛰쳐나갈 때, 수만 관중이 외친다. 아 주라! 아 주라! 담장을 넘어온 그 귀한 공, '아(애들)'에게 주라는 부산 사투리다. 어른들이 얼굴 붉히며 서로 갖겠다고 싸우지 말고 옆에서 경기를 구경하는 가장 어린 아이에게 주라는 뜻. 그래도 안 주면? 전 관중이 외친다. 마! 마! 마! 롯데 자이언츠 팬이 어떤 사람들인가. 등번호 11번, 최동원의 투지와 박력, 의리를 영원히 기억한다. '부산갈매기'를 떼창하고 봉다리(비닐봉투)를 뒤집어쓴다. 그 한 순간 한 순간이 팬들의 소중한 추억이다. 그 전통은 이어져야 한다. 공을 받은 아이도 어른이 된다. 자라는 동안 그 공을 준 다른 어른들처럼,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힘겹다. 삶이 늘 그렇다. 그래도 경기장에 또 오라고, 늘 응원하라고, 씩씩한 기원을 담아서… '아'들에게 '가가라(가져가라)'고 공을 넘겨준다. 누군가를, 또는 특정 다수를 좋아하기보다는 싫어하기가 더 쉽다. 존중보다는 차별이 더 쉽다. 인내보다는 증오와 혐오가 훨씬 간편하다. 상대방의 많은 단점을 감수하고 호의를 유지하는 것보다, 싫은 이유를 열거하는 편이 더 합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싫은 이유는 만들면 된다. 차별과 혐오, 증오의 논리는 얼마든 개발해낼 수 있다. 노키즈존을 옹호하는 이유와 논리가 딱 그렇다. 아이들은 영업에 방해될 수 있다. 에티켓을 덜 배웠거나 자제력이 부족한 경우들이 수두룩하다. 타인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극성 엄마들도 적잖다. 개별 노키즈존 업주들의 재산권보다 노키즈존이 금지할 광범한 아이, 부모 집단의 헌법상 권리가 우위에 있다는 점은 쉽게 간과된다. 그러나 노키즈존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아이들과 극성 엄마들이 가져올지 모를 불편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지난해 8월 인권위원회가 국내 일부 백화점의 VIP 라운지 노키즈존 방침에 대해 철회를 권고했다. 헌법상 아동과 그 가족의 행복추구권과 차별 받지 않을 권리, 즉 국민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취지다. 그럼에도 노키즈존은 여전히 늘고 있다. 지금은 '노00존'의 범위 자체가 확산일로다. 노인들이 불편한 일부 업주들은 '노시니어존'을 만든다. 특정 중년 여성들의 막무가내 태도가 싫은 업주들은 '노줌마존'을 만든다. 20대 남성이 막연히 '페미'들을, 비슷한 또래 여성들이 똑같이 막연히 '한남'들을 혐오하는 건 이제 뉴스도 아니다. 외국인 중 아시아계 유색인종도, 장애인도, 저소득층과 참사 희생자들의 발언도 점점 힘을 잃는다. 롯데 자이언츠 팬들은 담장을 넘어온 공을 경기장 내 가장 힘없는 약자에게 양보했다. 그게 아이들이다. 우리 팀의 승리를 응원하는 데 몇몇 아이들과 극성 엄마들의 철딱서니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존중과 인내보다는 차별과 혐오, 증오가 익숙한 문법이 된 사회에서 저출산 또는 저출생 그리고 수많은 사회적 갈등을 해결한다는 것은 아주 사치스러운 고민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