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내가 만난 정부 제 1호 동시통역사

2025-08-05     김철홍 자유기고가
김철홍

매일일보  |  지금도 생생한 34년 전,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CNN 동시통역 생중계를 진행해 크게 화제를 모았고, 한국 대통령, 미국 대통령,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비롯한 국가 왕족과 총리, 국내외 정재계 최정상을 전담 통역해와 이력서만 101장에 달하는 정부기관 제1호 통역사, 동시통역사계의 레전드이자 멘토 임종령 서울 외국어대학원 통번역대학원 교수를 얼마 전 만났다.

또한 TV 예능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하여 통역사가 되기 위한 노력, 통역사로서의 끊임없는 공부와 준비 그리고 교훈 등을 들려주었다. 이와 함께 진행자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 수줍게 인기 방송인 안현모 통역사의 고모라고 밝히고 두 딸을 미국 유명대학인 하버드와 UC버클리에 보낸 비결 등을 소개하면서 보인 겸손함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평소 찐팬으로 임교수를 만나보고 싶었던 소망이 공적인 자리에서나마 성사되어 기뻤고 ‘통역사란 직업에서 배운 교훈과 자녀의 영어 교육’이란 강의를 통해 그녀의 진가를 알 수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 1호 동시통역사의 자기 연마의 시간’이 부제인 저서 ‘베테랑의 공부’를 읽고서 그녀의 수십 년 노하우와 지혜가 담겨있음은 물론 통역사들의 공부량은 상상을 초월함을 알 수 있었다. 33년 차 통역사, 22년 차 교수인 그녀가 국제통역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초등학교 6학년까지는 A B C D 알파벳 정도 아는 실력이었으나 졸업 후 아버지가 외환은행 브라질 상파울루 지점장으로 발령이 나서 상파울루 현지 미국인 국제학교에 입학해 영어 수업을 했고 생활하면서 브라질의 공용어인 포르투갈어(포어)를 4년간 배웠는데, 오히려 영어보다 포어를 더 잘했다. 그녀가 귀국 후 동시통역사의 꿈을 꾸게 된 계기는 국제학교 시절 남미 학생들은 대부분 포어를 사용하기에 고등학교 영어교사 출신 어머니의 의사소통에 가교역할로 소통을 돕는다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과 대학교에 다닐 때 당시 대한체육협회 회장이던 대우그룹 회장의 비서였던 친척의 소개로 FIFA 회장이 방한했을 때 포어로 통역했던 일과 '86 아시안게임(탁구)과 '88 아시안게임(수영) 때 심판과 선수의 통역이 동기부여가 되었고 아버지의 전문직 권유와 함께 통역대학원 안내 팸플릿과 입시지원서 그리고 가장 두껍고 최고인 영한사전을 사다 준 적극적인 독려가 결정적이었다. 그렇게 진로를 결정한 후 통역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던 대학교 4학년 당시 미군 AFKN 방송을 들으면 이해가 되질 않아 33,000 단어책 한 권을 다 외웠다. 한국어와 영어 표현이 부족해서 작문이 어려웠을 때는 영작문 기초, 중급, 고급 이렇게 3단계로 된 책을 사서 한글을 읽고 입으로 영어로 내뱉으며 외워서 3권을 끝내고 나서 실력이 향상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이 듣고, 외우고, 써보는 것을 권장한다. 요즘에도 Youtube에 좋은 연설 등을 자주 듣고 있다. 보통 우리가 영어 생활권에 살면서 매일 영어를 접하지 않기 때문에 영어를 듣고 사용하고 말하는 나만의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실제 통역대학원에서는 ‘shadowing’이라는 매일 영어를 듣고, 말해보고, 외워서 써보고 하는 연습을 한다. 그래서 영어 뉴스를 들으면서 입으로 따라 하는 연습과 좋은 표현을 끊임없이 외우고, 소설도 듣고, 읽고 반복 학습하면서 외우는 것이 최고라는 팁을 소개한다. 그냥 외우기만 하면 의미가 없고 직접 써봐야 하고 외운 내용으로 직접 통역 연습하는 스터디와 파트너와 같이 영한-한영 통역을 하며 외운 단어를 쓰다 보면 비로소 내 것, 내 표현, 내 재산이 된다는 것이다. 흔히 통역하면 화자가 말하고 멈추면 통역사가 이어서 옮겨주는 방식인 순차통역(consecutive interpretation)을 말하는데, 동시통역(simultaneous interpretation)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고 통역부스가 대중에게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이때 4개 국어를 공식어로 채택했는데, 순차통역으로 하면 4배의 시간이 걸려 생각해 낸 것이 동시통역으로 발화자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언어로 옮겨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첫 동시통역 데뷔전은 교수의 추천으로 많은 사람에게 생생한 걸프전이 터지고 CNN 생중계 진행이다. 그동안 수많은 외국 정상, 왕족, 국내외 기업 회장 및 정치인 그리고 APEC, ASEAN, EU, G20, G8, 기후환경회의, UN 등의 다자회의 참석 및 수행을 했지만, 행사 관련 주제, 용어, 배경 지식, 회의자료 공부, 검토 등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고 행사에 따라서 마이크 등 하드웨어, 연사 미팅 등 소프트웨어를 직접 챙겨야 하는 경우도 있다. 평소 행사 관련 준비로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면 의사인 남편이 “전생에 얼마나 공부를 안했으면 이생에서 공부를 이토록 많이 하냐?”고 놀린다고 한다. 또한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의 성형학회 행사에서 통역을 맡아 일하는 모습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가 있어 남편을 통역 부스 안으로 초대해 자랑스럽게 보여줬지만 “공중전화 박스보다 조금 크네. 이런 좁은 곳에서 매일 일하는 거야? 너무 안됐다.”고 해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었는데, 다른 통역사들도 가족들로부터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한다. 통역사로서 그녀만의 첫 번째로 지키는 원칙도 있다. 통역 초창기에 통역 실수 등 매끄럽지 못해 잠 못 이루는 상황을 겪으면서 깨달아 날마다 자기를 리셋(reset)하는 것이다. 즉 초기화해 앞으로 살아갈 통역사로서의 긴긴 삶을 잘 살아낼 방법이란 생각을 하고 지난 33년 동안 밖에서 느낀 어떤 기분도 집으로 갖고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아주 오래전 부산에서 VIP들이 많이 초대된 대형 행사의 순차통역을 나갔다. 그런데 행사 주최 기관장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치명적인 실수에 실무자에게 “청중에게 말씀드리고 이름을 바로 잡겠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가서 직접 사과드리겠습니다.”라고 거듭 사과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통역료는 커녕 교통비도 받지 못한 실수담을 제자들에게 이야기 해준다면서 아주 가끔씩 영어를 알 만큼 알고 신문도 늘 읽으니까 평소 실력으로 잘될 거라는 마음으로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통역 부스로 들어오는 통역사 때문에 당황할 때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아무리 경력이 많고 화려한 경력도 늘 분야가 달라지고 같은 분야라도 주제가 달라지기 때문에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버벅되고 실수를 할 수 밖에 없어 통역사들은 고3 수험생처럼 늘 미친 듯 공부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즉 통역에 요행은 없다 그녀는 주변에서 동시통역사라는 직업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500퍼센트 만족한다고 한다. 왜 만족하냐고 물으면 “날마다 역사의 현장으로 출근하는 설렘 때문이에요. 30년을 했지만 아직도 설렌답니다”라고 답한다. 이는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국빈으로 방한했을 때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동시통역과 저녁 만찬장에서 영어로 사회를 봤는데, 국빈 만찬이 끝나고, 갑자기 트럼프 대통령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와 특유의 엄지척을 하면서 “You were great!(대단했어요!)”라고 직접 칭찬을 해준 일이나 2018년 일산 킨텍스 전시장 프레스센터에서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생중계의 동시동역을 위해 헤드셋을 쓴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 마디 한 마디에 해외 196개사 924명의 외신기자들이 울고 웃고 박수치며 좋아하고, 흥분의 도가니가 된 역사적인 모습을 보고 벅찬 감동에 휩싸였던 일 등이 말해준다. 자녀들의 영어 교육에도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딸 둘 중 첫째는 다행히 영어를 잘 따라 하고 재미있어했는데, 둘째는 엄마가 영어로 말을 꺼내면 입을 다물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아 나중에 물으니 엄마가 영어를 하면 외계인이 된 것 같아 무서워했다. 영어를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절대로 뭔가를 강요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뒤로는 애들이 먼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만 기회를 주고 도와주는 엄마로 바뀐 것이 아이들의 독립성을 키우고 스스로 적성을 찾게 한 밑거름이 되었다며 조기교육만이 정답이 아님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모두 다르니 다르게 키우되,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적성과 재능을 찾고 동기부여가 제일 중요하다. 또한 지식을 주입하지 말고 지식을 얻는 방법을 가르칠 것과 부모가 말로 push하지 말고 보여줄 것을 당부한다. 또한 “공부하라고 강요한 적은 절대 없었다”며 “애들이 말하기를 텔레비전을 틀면 엄마가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자려고 누우면 새벽에 엄마가 공부하려고 커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더라. 그래서 애들이 ‘엄마도 하는데 나도 공부해야지’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며 솔선수범의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도 아침형 인간이라 새벽 4시에 일어나면, 국내 신문을 정독하고 영자신문을 읽은 뒤 번역을 한다. 밤에는 다음 날 있을 통역 관련 자료를 검토하면서 잠자리에 드는데, 이 루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자 하는 자신과의 약속이란다. 또한 AI가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듯 언어를 완벽하게 익힐 순 있어도 감정이나 분위기 등 세밀한 부분까지 파악하기는 힘들고 스피치 서비스의 말투가 부자연스러워 거부감이 들어 AI가 아직 통번역사라는 직업을 위협할 수준은 아니라는 의견도 피력하는 임종령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세계 국제회의 통역사협회’에 가입된 12명 중 한 사람으로 영어공부 최고의 베테랑임에 틀림없다.   김철홍 자유기고가(문화유산국민신탁 충청지방사무소 명예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