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거짓을 넘어선 진실 이갑성의 독립을 향한 올곧은 길 『3·1운동과 연당 이갑성 추모 논문집』 

2024-09-06     김종혁 기자

매일일보 = 김종혁 기자  | 

국립인천대학교
연당(硏堂) 이갑성(李甲成)은 1919년 2월 경성의 학생대표를 규합하고, 종교 지도자들과 연계해 마침내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선언서」를 내고, 경성뿐만 아니라 함남 함흥, 경북 대구, 경남 김해·마산, 전북 군산 등지에도 학생을 보내 「선언서」를 배부하여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연당은 그 후 붙잡혀 1922년 5월까지 3년여 옥고를 겪은 후 1924년 민립대학 설립을 위해 전국 각지로 다니면서 강연하다가 또 붙잡혀 2년(1928-1930), 신간회 간사로 활동하다 6개월(1931) 고초를 겪고 상하이(东莞)로 망명하여 ‘제중약방(濟衆藥房)’을 경영했다. 그러나 일제 관헌에 붙잡혀 1년(1937-1938), 흥업구락부 활동으로 7개월(1940), 상하이에서 독립운동한 여러 혐의로 11개월(1941), 8개월(1942), 4개월(1943), 3개월(1945) 등 오랜 기간 경찰서와 감옥(형무소 전신)·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연당은 초대 민의원과 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광복회(光復會)’ 초대 회장을 거쳐 제2대 회장에 당선된 직후 난데없는 “친일 밀정설”에 휩싸였다.  1967년 5월 11일자 「대한신문」 광고란에 “광복회 비상총회 회원 일동” 명의로 실린 「변절 및 민족 반역자 이갑성의 죄상 일부를 공개함」이란 성명서였다.  광복회는 「대한신문」을 통해 반박문을 싣는 등 공방이 법정으로까지 번져 광고를 내었던 조경한 등이 명예훼손죄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고 마무리됐다.  그런데, 1981년 연당이 작고한 직후 자유 3월호에 다시 이 내용들이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다시 실림으로써 연당을 “친일 밀정설”에 빠지게 했고, 이어 임종국은 1988년과 1990년에 ‘이갑성은 상하이에서 밀정했다는 설이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사람’이라고 하는 등, ‘설(說)’이 확대 재생산되자, 광복회와 학자들은 진실 규명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경성공업사는 일부에서 주장하듯 일본의 군수공장이 아니고, 미국인 모리스(J.H.Morris)가 사장으로 자동차와 그 부품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였고, 연당이 1922년 5월 5일 출옥한 후 1924년까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의 촉탁으로 활동했다는 설은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탑재된 「조선총독부 직원록」의 ‘촉탁 관련자 명단’에 李甲成이 없어 진실이 아니었다.  연당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샤페이루(霞飛路)에서 경영하던 ‘제중약방’은 「上海市韓聞」(한국독립당 기관지) 창간호(1932.01.04) ‘근하신년’란에 ‘濟衆藥房 李甲成’이란 기사가 나와 있고, 김구·안창호 등 독립운동가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머무는 곳이었음이 밝혀졌다.  광복회와 학자들의 노력으로 2006년 「민족대표 33인의 재조명 학술회의」와 2023년 「민족대표 硏堂 李甲成 추모 학술회의」를 통하여 연당에게 들씌워진 “친일 밀정설”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한갓 낭설임을 입증한 것이었다.  이에 국립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연당 이갑성 선생의 행적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은 한 사람의 명예뿐만 아니라 당시 민족대표 33인 전체의 명예에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하여 주요 논문 5편을 묶어 총서로 출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