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악마의 열매' 능력자들은 정말 악마가 되려는가

2025-09-18     이용 기자

매일일보 = 이용 기자  |  인기 만화영화 ‘원피스’에는 악마의 열매라는 설정이 있다. 이 열매를 먹으면 수영을 할 수 없는 대신, 상식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한 초능력을 얻게된다.

가령 고무고무 열매를 먹은 주인공 루피는 피부는 물론 뼈와 장기까지 고무로 변하는 고무인간이 된다. 이글이글 열매를 먹은 자는 신체를 불(火)로 바꿀 수 있어서 총칼에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데다, 불꽃을 활용한 화려한 공격까지 할 수 있다. 악마의 열매는 작품의 재미를 더해주는 흥미로운 소재로, 독자들은 새 인물이 나올 때마다 ‘그는 과연 무슨 열매를 먹은 능력자일까’하는 기대를 갖게 된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해당 만화가 30년 가까이 연재되는 동안 그 엄청난 능력을 갖고도 이타적인 행동으로 독자를 감동시키는 능력자는 딱히 등장하지 않았단 점이다. 능력은 보통 해적들의 싸움박질에 이용될 뿐, 세상을 떠돌아 다니면서 적극적으로 사람을 구하는 ‘성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 루피는 분명 약자의 눈물에 움직이는 정의의 인물이지만, 그의 목표는 약자 구제가 아닌 ‘해적왕’이다. 루피의 힘은 그저 주변에 있는 피해자만 구해내는데 그친다. 심지어 우리 세상의 모든 외과의사들이 탐낼만한 ‘수술수술 열매’를 먹은 녀석조차 그 능력을 싸움에만 사용한다. 이 녀석은 직업이 선의(배의 의료인)임에도! 원피스 작가는 수술수술 열매의 설정에 대해 “과거 어느 의사가 이 열매를 먹고 기적의 수술 능력을 얻어 난치병과 괴질을 고치고 전설로 알려졌다”고 소개했다. 그 의사와는 정 반대로, 주인공급 인기를 누리는 선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능력을 쓰는 셈이다. 식물을 자라게 하는 숲숲열매, 호르몬을 조작하는 호르호르 열매, 과자를 만드는 비스킷비스킷 열매 등 세계에 만연한 기근과 질병을 해결할 수 있는 열매는 계속 등장하지만, 정작 능력자들은 사람들을 구제할 생각조차 없다. 일부 능력자들은 열매의 힘으로 민초를 지배하거나 핍박하는 등 그야말로 악마나 다름 없는 행보를 보인다. 상업만화 특성상 능력자끼리 싸움은 당연한 전개겠지만, 수십년 연재하고도 이타적인 인물상이 한 번도 그려지지 않은 건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의대증원 문제로 병원을 떠난 의사들도 악마의 열매 능력자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의사에겐 진료와 수술 모두 주도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이 주어진다. 의사가 아닌 자에겐 수술은 커녕 진료조차 받을 수 없기에, 의사는 그야말로 사람을 살릴수도 죽일수도 있는 능력을 가진 것과 다름없다. 현재 의료계는 이 거대한 힘을 정부와의 기싸움에 쓰는 중이다. 유일하게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의료의료 열매(?)의 능력으로 환자들을 볼모로 잡고 정부의 사과를 원한다는 점은, 여느 소년만화 악당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모양새가 더 안 좋다. 원피스에 등장하는 능력자들은 주로 해적과 해군으로, 싸움이 업이지만, 의사의 업은 인명 구조 아닌가. 국민들을 위해서 충분히 그 힘을 쓸 수 있음에도, 의료공백은 뒷전이다. 의정갈등은 의료계는 물론 법조계, 정치계, 학계 등 온갖 능력자가 모여들어 싸우는 현대판 ‘정상전쟁’이 됐다. 대중을 위해 쓸 힘을 엉뚱한 곳에 소비하는 형국이다. 이제 능력자들이 국민들을 돌아보고, 망가진 의료 현장 복구를 위해 능력을 사용해야 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