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김 “교도관, 짐승 취급.알몸수색에 모멸감”
9년간 스파이로 옥살이한 풀스토리
2006-11-12 권민경 기자
<'나는 스파이 아니었다. 조국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일>
<수감 초기 자살충동, 가족에게 미안함 등 심경고백>
환호 뒤에 가려진 절망의 세월
지난 6일 귀국장에는 96년 사건 당시 김씨로부터 기밀문서를 넘겨받았던 백동일 예비역 대령(57)이 나와 김씨 부부를 맞았고, ‘로버트 김 후원회 회원’ 30여명이 나와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김씨는 이날 가진 기자회견에서 “사건 초기 너무 과한 형량을 부과한 미국 정부나 구명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정부에 섭섭한 마음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무엇보다 이 사건으로 국민의 따뜻한 사랑을 맛보았다” 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미국 해군 정보군 정보 분석가였던 김씨는 지난 96년 9월24일 한반도 관련 30여건의 기밀문서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징역9년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고 지난해 7월까지 수감했다. 그가 백 대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11월 28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해군 정보교류회의’에서였다. 당시 백 대령은 주미 한국대사관의 정부 수집 임무를 가진 장교였다.회의를 마치고 앤드루 미 공군기지의 장교클럽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중 백 대령은 김씨에게 “정보수집 능력에 한계가 있는 한국으로서는 북한군 관련 첩보를 제대로 입수하지 못하니 기밀이 아닌 사항은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한국군의 대북 첩보수집 여건이 그렇게 열악하냐” 고 물은 후 “도와줄 수 있는 한은 도와주겠다” 고 답했다. 이후 김씨는 한국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우편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씨는 지금까지도 결단코 이 정보들이 “미국의 국방 관련이나 안보사항은 없었다” 고 설명한다.
<11월 10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로버트 김 인터뷰 내용 중>
Q- 당시 행동을 할 때 발각될 염려를 했을 텐데, 만약 그렇다면 국가가 어떤 조치를 취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나. 김-“국가가 어떤 도움이나 조치를 취해주리라고 기대한 적은 없다. 또 내가 국가를 위해 뭔가를 도와준 것이지 지금까지도 내가 스파이활동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에게는 조국이 두개가 있었다. 내가 선택한 조국(미국)과 나를 태어나게 한 조국(한국), 은퇴할 시기가 가까워 오자 내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때 조국에 뭔가 도와주고 싶었다. 물론 법을 어기면서까지 도와주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Q- 김 선생의 그런 행동이 한미동맹에 안 좋은 영향을 줄 거라는 생각은 안했나김-“한미동맹 관계에 내 사건이 지장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내 일이 하나의 ‘케이스’가 돼 미국이 나중에 이용하려고 했을 수는 있지만 한미동맹의 큰 테두리 안에서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는 생각지 않는다.”Q- 백 대령께 여쭙겠다. 김 선생이 건네 준 자료가 당시 대북관계에 중요한 자료였나.백 대령- “로버트 김이 준 정보 가운데 대북정책 수립에 기여를 한 것 분명 있었다. ‘북한 무기에 대한 동향’, ‘우리가 원조하고 있는 식량이 군부에도 유입되고 있다’ 등의 정보...(이에 대해 김씨는 ‘기억 안 난다’ 고 덧붙임)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 상의 병력 배치 실태’ 등이 있었다. Q- 정말 김 선생을 스파이로 몰 만큼 많은 정보들 이었나백- “내가 많이 있다면 있는 거고, 아니라면 아닌거고...어쨌든 미국과 한국의 자료판단기준에는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아니어도 미국 입장에서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도 있다. Q- 김 선생이 준 정보가 뉴질랜드, 호주 등 제3국에는 전달됐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오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맞나백-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다른 나라에는 그와 유사한 정보들이 들어간 걸로 알고 있다.”김- 보내지는 국가마다 코드가 다 있는데, 받는 사람은 모르지만 보내는 사람은 알고 있다..... 침묵... (인정하는 침묵)Q- 그런 경우가 많았나김- 예...Q- 김 선생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미국 정부의 감시가 있었다는 걸 몰랐나백- “김 선생님이 보내주는 자료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부에서는 자꾸만 더 많은 자료를 요구하고 나는 거기에 부응해야 했기 때문에...결국 ‘독이 든 사과를 먹은 것’이었다 더구나 마지막에 온 자료는 봉투를 개봉한 흔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Q- 백 대령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김씨의 자료를 받겠는가백- “무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할 것이다”Q- 체포된 이후 한국정부의 반응에 어떤 생각이 들었나김- “한국정부의 반응, 조금 섭섭했다. 한국정부가 공모를 인정하고 선처를 요구했다면 미국 정부에서도 어느 정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내 형량은 갈수록 늘어나 결국 혼자 모든 짐을 져야 하는데 섭섭했다.”백- “내 자신이 옷 벗을 각오를 하고 김 선생님을 도와줬다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그 점은 죄송하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엄연한 공인으로서, 공직자로서 한 일이지 국가와 상관없는 개인으로서 한 일이 아니다. Q- 힘들겠지만 수감 시절에 대해 말해 달라김-“수감생활 중 가장 어려웠을 때가 ‘수감초기’였다. 내가 무기수가 되고 집에 못 갈 봐 에야 끝까지 안했다고 우기고 그냥 무기수가 되던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유기수가 돼 집에 돌아가는 것인지 사이에서 갈등하다 처음에는 자살까지도 생각했다. 형이 확정된 후 교도소로 가서 생활할 때 아들 뻘 되는 교도관들이 미국에서는 ‘말’을 부를 때 사용하곤 하는 ‘hey'하고 부를 때마다 힘들었다. 또 면회가 끝나고 들어갈 때 몸수색을 위해 옷을 전부 벗기고, 뒤지고 할 때 너무 모멸스럽고 괴로웠다. Q- 김씨의 부인 장씨에게, ‘남편이 한 일이 과연 잘한 일이라 생각하나’장- 한 가정의 가장으로 봤을 때 남편이 한 일은 잘한 일이라 볼 수 없다. 또 당시 나는 남편이 체포된 이후에야 모든 일에 대해 알았고, 이전에는 남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남편의 체포 후 먹고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김- “나는 집에가서 ‘i love you’만 하면 됐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로보트 김이 살아온 길> 1940년 부산에서 태어난 로버트 김은 본향인 전남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경기고, 한양대학교를 졸업했다. 김씨의 부친 김상영 옹은 한국은행 부총재와 초대 전경련 상근부회장, 8,9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경제연구소인 ‘산정연구소’를 운영하는 등 한국 정치, 경제계의 원로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동생인 김성곤은 고려대학 문과대학 학생회장으로 반독재투쟁을 하던 중 지난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었고, 결국 학교에서도 제적당했다. 이 사건은 아버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2선 국회의원이던 김옹을 공천하지 않아 결국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복학이 불가능해 방황하던 동생 성곤은 형인 로버트 김의 제의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템플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1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대학교수가 되었다가 지난 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 부자가 같은 지역에서 대를 이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흔치 않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한편 김씨는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인디애나 주 퍼듀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1970년 NASA(미항공우주국)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4년간 근무하다 1978년부터는 ONI(미해군정보국)에서 19년 동안 컴퓨터 전문가로 일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중요한 군사전략을 다루는 위치에 오른 그는 안정된 미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동생의국회의원 당선으로 김씨는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로 살면서 자신을 낳아준 조국에 뭔가 뜻 깊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김씨는 “그것이 미국에 대한 배신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고 말한다. 당시 일본 정보당국에서도 북한 잠수함이 동해에 자주 나타났고, 심지어 제주도 근해에까지 항적을 남기고 있었음을 포착하여 일본 정계 고위급 인사들이 한국의 지인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알려주기까지 했음에도 우리 군 당국만 과학적 정보수단 부족으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김씨의 입장에서는 그에게 올라오는 한반도 관련 정보가 미국 동맹국 중 알 필요가 없는 나라에는 나가면서 정작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로서는 그 점이 안타까웠고,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었다. 때문에 기꺼이 백 대령을 도왔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김씨는 지금도 자신은 스파이가 아니었다고 당당히 밝힌다. “내 행동은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란 것이 아닌 조국의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일” 이라고. kyoung@sisa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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