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김 “교도관, 짐승 취급.알몸수색에 모멸감”

9년간 스파이로 옥살이한 풀스토리

2006-11-12     권민경 기자

<'나는 스파이 아니었다. 조국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일>
<수감 초기 자살충동, 가족에게 미안함 등 심경고백>

[매일일보=권민경 기자] 1996년 9월24일 당시 미 해군 정보국 군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이 (65. 김채곤) 주미 한국 대사관 해군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국가기밀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 FBI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2005년 11월 6일, 9년여의 수감 및 억류 생활을 마치고 그는 드디어 고국 땅을 밟았다.

귀국장에서 김씨는 “나는 스파이가 아니었다. 한국 정부가 고용한 사람도 아니었다. 백 대령과의 친분관계에서 출발 해 때로는 그의 요청에 의해, 때로는 자발적으로 그러나 아무 대가 없이 그가 필요로 할 정보를 우송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로버트 김 사건은 미국의 주장대로라면 미국 시민권자인 그가 자신의 국가의 기밀을 유출함으로써 미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면에는 당시 한미관계, 남북관계, 그리고 개인과 국가가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애국심의 문제 등이 얽힌 복잡한 사건이었다. 김씨의 귀국과 함께 다시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로버트 김 사건’을 재조명해 보자.

환호 뒤에 가려진 절망의 세월

지난 6일 귀국장에는 96년 사건 당시 김씨로부터 기밀문서를 넘겨받았던 백동일 예비역 대령(57)이 나와 김씨 부부를 맞았고, ‘로버트 김 후원회 회원’ 30여명이 나와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김씨는 이날 가진 기자회견에서 “사건 초기 너무 과한 형량을 부과한 미국 정부나 구명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정부에 섭섭한 마음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무엇보다 이 사건으로 국민의 따뜻한 사랑을 맛보았다” 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미국 해군 정보군 정보 분석가였던 김씨는 지난 96년 9월24일 한반도 관련 30여건의 기밀문서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징역9년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고 지난해 7월까지 수감했다. 그가 백 대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11월 28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해군 정보교류회의’에서였다. 당시 백 대령은 주미 한국대사관의 정부 수집 임무를 가진 장교였다.

회의를 마치고 앤드루 미 공군기지의 장교클럽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중 백 대령은 김씨에게 “정보수집 능력에 한계가 있는 한국으로서는 북한군 관련 첩보를 제대로 입수하지 못하니 기밀이 아닌 사항은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김씨는 “한국군의 대북 첩보수집 여건이 그렇게 열악하냐” 고 물은 후 “도와줄 수 있는 한은 도와주겠다” 고 답했다. 이후 김씨는 한국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우편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씨는 지금까지도 결단코 이 정보들이 “미국의 국방 관련이나 안보사항은 없었다” 고 설명한다.

로버트 김 후원회에서 주장하는 바 역시도 “이 정보들은 미국의 안보나 재산(인명피해 포함)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후원회는 “그래서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이런 사건에서 꼭 제출해야만 하는 아이템인 Damage Assessment Report(피해평가보고서)를 재판관에게 제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1996년 9월 18일,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으로 남북은 물론 한미 양국관계에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은 “당사자들(남북한)은 우리가 남북대화나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진전시킬 수 있도록 추가적인 도발행위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이 사건은 분명 불가침 합의를 깨고 남한 영토 안으로 들어온 북한의 도발행위인데도 미국이 남북한을 동급으로 놓고 자제를 요구한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터져 나왔다. 상부로부터 관련 정보수집을 재촉 받은 백 대령은 미국이 북 잠수함의 이동로를 알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아닌가 추측하고, 그 증거를 찾기 위해 김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김씨는 “미국이라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며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백 대령의 요청을 받고 김씨는 잠수함 사건이 있기 3일 전으로 소급해 북한 잠수함의 경로를 추적했고, 두 대의 잠수함이 동해안을 오고 간 위치들이 추적되었다고 백 대령에게 통화로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날 통화 이후 얼마 안 되어 김씨는 스파이혐의로 FBI에 의해 체포되었다. 김씨는 97년 7월 징역 9년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받고 힘겨운 복역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지난 2002년 부시 대통령 방한 때 한국 정부는 김씨의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게 되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방미 때도 김씨 사면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일정부분 힘입어 김씨는 감형조치를 받고 지난해 6월 교도소에서 나와 가택 수감 생활을 하게 됐고, 7월부터 보호관찰에 들어갔다. 1년 정도의 보호관찰 끝에 지난 8월 로버트 김은 미국 법원에 보호관찰을 정지해줄 것을 신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마침내 자유의 몸이 됐다. 김씨는 멀고도 멀었던 9년간의 수감을 끝내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사건 당시부터 로버트 김 후원회를 비롯한 김씨 측에서 주장했던 내용들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김씨를 변론하는 측에 의하면 김씨가 백 대령에게 1995년 12월부터 제공한 자료는 약 50여 건인데, 이 중에는 미국의 주장처럼 미국의 국가 안보에 위해가 될 만한 내용은 없었다는 것이다. 또 그것들은 주로 미국이 아닌 한반도 정세와 관련된 것이었고, 영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에는 이미 제공된 것들이었다. 사건 담당 검사는 법정에서 “어떤 정보가 미국 안보에 중요한 것인지, 그것이 왜 공유되지 않았는지는 미국의 고위 관리들이 결정할 사항이다”라고 말했지만, 김씨 후원회측은 “해군 정보국에서 19년 동안 일해 온 로버트 김이 어떤 내용이 민감한 정보인지 모를 리 없었다.” 고 주장했다. 그의 변호사였던 피터 긴스버그도 “로버트 김이 한국에 넘겨주었다고 주장하는 서류들은 역으로 미국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정보들은 대중을 상대로 한 정기간행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동맹국과 공유할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다.”라고 변론했다. 그러나 이 변론은 당시 검사나 판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씨는 백 대령에게 서류를 보낼 때는 자료출처와 비밀등급을 지우고, 반송될 경우를 대비해서 자신의 주소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FBI의 감시 자료에 의하면 김씨가 백 대령의 집에 직접 갔다가 그가 없자 정원에 있던 아들에게 전해주기도 했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백 대령에게 서류를 잘 받았느냐고 전화하는 모습도 찍혀있다. 그리고 1996년 9월, 10여건의 기밀서류가 전달될 당시 봉투가 개봉된 흔적이 있어서 자료 제공을 중단한 일도 있었다. 김씨 후원회는 “이런 행동들로 인해 두 사람은 첩보 분야 종사자들로부터 ‘어설픈 삼류 스파이’라고 지적 받았는데, 달리 말하면 그것은 두 사람에게 스파이 행위를 한다는 인식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고 주장했다.사실 김씨가 체포되던 당시는 한국과 북한, 미국의 정세가 김씨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측면이 있었다. 김씨가 체포되기 6일 전 한국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강원도 강릉시 안인진리 해안으로 북한의 상어급 소형 잠수함이 침투해 좌초된 초대형 안보사건이 터진 것이다. 당시 한국 국방부는 원산 송전반도에 있는 북한 해군 잠수함 기지에서 두 척의 상어급 참수함이 출동했고, 그 중 한 척이 원산항으로 되돌아온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돌아오지 않은 나머지 한 척이 강릉으로 침투한 것인데, 미국의 첩보능력으로 미루어 보면 이 잠수함의 이동로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한국의 대잠정보로는 P3-C라는 대잠초계기에 주로 의존했는데, 그 비행기가 10여대에 불과해서 서해,동해, 남해 전체를 커버하진 못했다. 대잠초계기는 SONAR라는 수중음파탐지장치를 바닷물에 담궈서 잠수함, 잠수정이 발생시키는 음파를 탐지하는 것이다. 어쨌든, 당시 외교통상부는 백 대령에게 동해안 대잠정보 수집을 명령했다.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백 대령은 김씨에게도 그와 관련한 정보를 요청했다. 외교관이 쓰는 전화는 100% 주재국의 외사방첩기관에서 도청한다. 하지만 백 대령은 한국에서 일어난 워낙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예로 보아 정보를 요청하면 당연히 미국 측에서 기밀이 아닌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믿고 미 국방부의 정보본부(DIA)와 미 해군성의 정보 참모부(I-2)와 작전,기획참모부(N-3&N-5) 등에 전화를 걸어 자료제공을 부탁했다. 김씨는 백 대령의 부탁으로 해군정보국의 컴퓨터를 통해 북 잠수함 사건이 언론에 터지기 직전부터 사흘 전까지의 모든 정보를 검색해본 결과 북 잠수함이 동해안에 좌초되기 전부터 미국은 한국의 영해로 들어온 북 잠수함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결국 미국은 북 잠수함이 동해안에 좌초되면서 그 실체를 알았던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북 잠수함의 침투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런 정황으로 봤을 때 김씨 측에서는 “로버트 김의 체포도 이 사건과 연관이 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고 보는 것이다. 김씨의 최종 재판이 열리기까지는 10개월이 소요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사람들의 뇌리에서 김씨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당연히 구명운동 또한 소강상태였고, 한국 역시 정치적으로 재벌들의 부도와 경제위기설이 맞물리면서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한보비리와 청문회’ 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기 때문에 이목이 온통 그곳에 쏠려 있었다. 이런 것조차도 김씨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작용한 것이다. 결국 김씨는 9년의 수감이라는 지옥 같은 나날을 홀로 견뎌내고서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제 김씨는 서류상으로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미 당국은 김씨 사건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으며 어쩌면 김씨는 여전히 감시 등에 조심하며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자신이 태어난 조국과 선택한 조국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한국을 택함으로 인해 김씨는 30여년간 쌓아왔던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김씨의 사건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애국심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또 국가마다 다르게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인지. 또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정의와 불의의 기준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학 된다.

<11월 10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로버트 김 인터뷰 내용 중>

Q- 당시 행동을 할 때 발각될 염려를 했을 텐데, 만약 그렇다면 국가가 어떤 조치를 취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나. 김-“국가가 어떤 도움이나 조치를 취해주리라고 기대한 적은 없다. 또 내가 국가를 위해 뭔가를 도와준 것이지 지금까지도 내가 스파이활동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에게는 조국이 두개가 있었다. 내가 선택한 조국(미국)과 나를 태어나게 한 조국(한국), 은퇴할 시기가 가까워 오자 내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 때 조국에 뭔가 도와주고 싶었다. 물론 법을 어기면서까지 도와주면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Q- 김 선생의 그런 행동이 한미동맹에 안 좋은 영향을 줄 거라는 생각은 안했나김-“한미동맹 관계에 내 사건이 지장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내 일이 하나의 ‘케이스’가 돼 미국이 나중에 이용하려고 했을 수는 있지만 한미동맹의 큰 테두리 안에서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는 생각지 않는다.”Q- 백 대령께 여쭙겠다. 김 선생이 건네 준 자료가 당시 대북관계에 중요한 자료였나.백 대령- “로버트 김이 준 정보 가운데 대북정책 수립에 기여를 한 것 분명 있었다. ‘북한 무기에 대한 동향’, ‘우리가 원조하고 있는 식량이 군부에도 유입되고 있다’ 등의 정보...(이에 대해 김씨는 ‘기억 안 난다’ 고 덧붙임)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 상의 병력 배치 실태’ 등이 있었다. Q- 정말 김 선생을 스파이로 몰 만큼 많은 정보들 이었나백- “내가 많이 있다면 있는 거고, 아니라면 아닌거고...어쨌든 미국과 한국의 자료판단기준에는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아니어도 미국 입장에서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도 있다. Q- 김 선생이 준 정보가 뉴질랜드, 호주 등 제3국에는 전달됐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오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맞나백-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다른 나라에는 그와 유사한 정보들이 들어간 걸로 알고 있다.”김- 보내지는 국가마다 코드가 다 있는데, 받는 사람은 모르지만 보내는 사람은 알고 있다..... 침묵... (인정하는 침묵)Q- 그런 경우가 많았나김- 예...Q- 김 선생과 정보를 교환하면서 미국 정부의 감시가 있었다는 걸 몰랐나백- “김 선생님이 보내주는 자료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부에서는 자꾸만 더 많은 자료를 요구하고 나는 거기에 부응해야 했기 때문에...결국 ‘독이 든 사과를 먹은 것’이었다 더구나 마지막에 온 자료는 봉투를 개봉한 흔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Q- 백 대령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김씨의 자료를 받겠는가백- “무관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할 것이다”Q- 체포된 이후 한국정부의 반응에 어떤 생각이 들었나김- “한국정부의 반응, 조금 섭섭했다. 한국정부가 공모를 인정하고 선처를 요구했다면 미국 정부에서도 어느 정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내 형량은 갈수록 늘어나 결국 혼자 모든 짐을 져야 하는데 섭섭했다.”백- “내 자신이 옷 벗을 각오를 하고 김 선생님을 도와줬다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그 점은 죄송하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엄연한 공인으로서, 공직자로서 한 일이지 국가와 상관없는 개인으로서 한 일이 아니다. Q- 힘들겠지만 수감 시절에 대해 말해 달라김-“수감생활 중 가장 어려웠을 때가 ‘수감초기’였다. 내가 무기수가 되고 집에 못 갈 봐 에야 끝까지 안했다고 우기고 그냥 무기수가 되던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유기수가 돼 집에 돌아가는 것인지 사이에서 갈등하다 처음에는 자살까지도 생각했다. 형이 확정된 후 교도소로 가서 생활할 때 아들 뻘 되는 교도관들이 미국에서는 ‘말’을 부를 때 사용하곤 하는 ‘hey'하고 부를 때마다 힘들었다. 또 면회가 끝나고 들어갈 때 몸수색을 위해 옷을 전부 벗기고, 뒤지고 할 때 너무 모멸스럽고 괴로웠다. Q- 김씨의 부인 장씨에게, ‘남편이 한 일이 과연 잘한 일이라 생각하나’장- 한 가정의 가장으로 봤을 때 남편이 한 일은 잘한 일이라 볼 수 없다. 또 당시 나는 남편이 체포된 이후에야 모든 일에 대해 알았고, 이전에는 남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남편의 체포 후 먹고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김- “나는 집에가서 ‘i love you’만 하면 됐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로보트 김이 살아온 길> 1940년 부산에서 태어난 로버트 김은 본향인 전남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경기고, 한양대학교를 졸업했다. 김씨의 부친 김상영 옹은 한국은행 부총재와 초대 전경련 상근부회장, 8,9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경제연구소인 ‘산정연구소’를 운영하는 등 한국 정치, 경제계의 원로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의 동생인 김성곤은 고려대학 문과대학 학생회장으로 반독재투쟁을 하던 중 지난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었고, 결국 학교에서도 제적당했다. 이 사건은 아버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2선 국회의원이던 김옹을 공천하지 않아 결국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복학이 불가능해 방황하던 동생 성곤은 형인 로버트 김의 제의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템플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1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대학교수가 되었다가 지난 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 부자가 같은 지역에서 대를 이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흔치 않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한편 김씨는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인디애나 주 퍼듀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1970년 NASA(미항공우주국)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4년간 근무하다 1978년부터는 ONI(미해군정보국)에서 19년 동안 컴퓨터 전문가로 일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중요한 군사전략을 다루는 위치에 오른 그는 안정된 미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동생의국회의원 당선으로 김씨는 미국 사회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로 살면서 자신을 낳아준 조국에 뭔가 뜻 깊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김씨는 “그것이 미국에 대한 배신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고 말한다. 당시 일본 정보당국에서도 북한 잠수함이 동해에 자주 나타났고, 심지어 제주도 근해에까지 항적을 남기고 있었음을 포착하여 일본 정계 고위급 인사들이 한국의 지인들에게 비공식적으로 알려주기까지 했음에도 우리 군 당국만 과학적 정보수단 부족으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김씨의 입장에서는 그에게 올라오는 한반도 관련 정보가 미국 동맹국 중 알 필요가 없는 나라에는 나가면서 정작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로서는 그 점이 안타까웠고,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었다. 때문에 기꺼이 백 대령을 도왔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김씨는 지금도 자신은 스파이가 아니었다고 당당히 밝힌다. “내 행동은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란 것이 아닌 조국의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일”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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