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이야기]경제위기가 만들어낸 전쟁기계 '히틀러' (4)

경제적관점에서 본 정치체제의 변화

2015-08-12     이석호 기자

[매일일보] 독일국민이 선택한 히틀러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가 정점으로 치닷던 1923년, 만 34세의 히틀러는 짧게 나치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독일어 약자로 NSDAP)의 독재적 지위를 가진 당수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내세웠던 당의 강령은 민주공화제 타도와 독재정치의 강행, 민족주의와 반 유대주의 그리고 백화점과 국제 자본 공격 등이었다. 그의 선동적인 연설은 오늘날에도 유명하지만, 당시의 경제상황을 미루어 짐작하면 그의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시의적절했던 내용과 선동적인 연설로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던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당의 로마진군에 자극받아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투옥된다.옥중에서 출판한 “나의 투쟁”이라는 저서를 통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하며 민중의 지지를 받은 그는 짧은 6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합법적인 운동을 통해 민주 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당은 사실상 해체 상태였고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히틀러의 뮌헨봉기 1개월전에 단행된 “통화 개혁 선언” 때문이다.

렌텐마르크의 기적

1923년 10월 15일에 “1렌텐 마르크는 1조 마르크에 해당한다”라는 새로운 통화의 도입이 선언됐다. 이날 이후 라이히스 은행의 업무는 렌텐 은행에 의해 넘어가게 된다. 렌텐 은행이 발행할 수 있는 최대의 통화량은 32억 렌텐 마르크로 제한됐고, 또한 정부가 발행하는 증권의 렌텐마르크의 인수액도 12억 마르크로 상한액을 정했다. 정부는 세수를 증대해 나가는 것과 함께 재정지출을 삭감하는 개혁을 실시하였다.

1924년이 되자 정부재정은 흑자로 돌아서고 정부의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추가적 대출도 끝나 인플레는 종식되었다. 이 인플레의 급격한 종식을 “렌텐 마르크의 기적”으로 부른다.  이 화폐개혁으로 인해 독일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극좌와 극우 정당들은 지지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이러한 화폐개혁과 미국의 원조로 인해 독일 경제는 부흥하게 된다. 당시 영국,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미국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고 아직 경제가 불안한 독일 또한 영국, 프랑스에 배상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이에 미국, 영국, 프랑스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 미국은 독일에 원조를 하여 독일 경제를 부흥시키고, 2. 독일은 부흥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국, 프랑스에 배상금을 제대로 지급할 것, 3. 영국, 프랑스는 독일에게 받은 배상금으로 미국에 빚을 갚을 것 등의 3가지 원칙에 합의했다.이것이 일명 ‘도스’안이라고 한다. 어차피 독일 경제의 부흥이 피폐해진 유럽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프랑스 또한 종래의 강경한 입장에서 선회하여 독일 경제 부흥에 합의하게 된다.이후 이 ‘도스’안에 의해 독일 경제는 부흥되고 이에 따라 유럽경제도 안정을 찾게 된다. 즉, 이러한 경제적안정은 극우, 극좌의 정치세력의 지지자들이 이탈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