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작년말 초유의 유동성 위기 사태
2005-03-21 파이낸셜투데이
정부가 작년 말 유동성이 부족해 한국은행 차입금을 제때에 상환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진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게다가 정부는 이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 한국은행에서 또다시 차입해 채무를 갚는 `돌려막기'를 감행함으로써 내용적으로는 채무를 갚지 않은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정부는 이 과정에서 회계간 자금 전용 금지 조항 등 관련 법률을 위반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의 재정 운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정부가 유동성 위기에 몰린 정확한 이유와 다급하고 무리한 수습 방식을 택한 배경 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21일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에 따르면 정부는 일반회계상의 한국은행 일시 차입금 1조원을 작년 말까지 갚아야 했으나 자금 확보가 불가능하자 양곡관리특별회계를 통해 한은에서 1조원을 긴급히 차입해 만기일인 12월31일에야 가까스로 상환했다. 이에 앞서 재경부는 만기일을 불과 2~3일 앞두고 일반회계 차입금 만기 연장을 한은에 요청했으나 관련 규정 위반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금융통화위원회를 열어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다 역시 불발로 끝났다. 재경부 관계자는 "한은이 만기 연장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도 2조원에 만기가 2004년 9월30일까지인 양곡회계의 기존 채무 9천400억원 외에 1조원을 추가로 차입한 뒤 일반회계로 전용해 한국은행 채무를 상환했다"고 밝히고 "정부가 이런 유동성 부족 상황에 직면한 것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이어 올 1월13일 일반회계로 1조원을 한은에서 빌린 뒤 14일 양곡회계상의 채무 중 1조원을 갚아 또다시 차입금으로 차입금을 갚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부는 또 회계간 자금 전용을 `여유 자금'으로 제한하고 있는 국고금관리법 31조 등 관련 법률을 어겼으며 한은의 발권력과 정부 재정을 엄격히 분리함으로써 정부 내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와 통화 팽창을 막으려는 입법 취지를 손상시켰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권기율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전문위원은 "차입으로 확보한 부채성 자금은 당연히 여유 자금에 해당될 수 없다"고 못박고 "일반회계 차입금을 갚기 위해 양곡회계에서 빌린 후 일반회계로 넘기는 것은 법률 위반에 해당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한은 관계자는 "사실상 정부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에 직면했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해석하고 "결과적으로 재경부의 이번 차입금 운용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되나 빌린 돈을 어디에 사용하는 지를 일일이 점검하고 캐묻는 것은 한은-재경부 역학 관계상 쉽지 않은 일"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와 관련, 재경부 관계자는 "작년부터 전자이체 등 선진화된 세출 방식이 도입돼 지출은 신속히 이뤄지는 반면 세입은 시중은행 등을 거쳐 더디게 들어오기 때문에 일시적 자금 부족 사태가 벌어졌으며 불경기 등에 따른 세입.세출 예측의 어려움과 재정증권 발행을 통한 부족 자금 확보의 절차적 복잡성 등도 유동성 부족 사태의 원인일 수 있다"고 해명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그러나 "정부가 국민의 세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일시적 수급 불안이라는 정부의 해명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기업도, 개인도 아닌 정부가 채무를 갚지 못해 디폴트 상태에 빠졌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