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그냥 돈을 나눠주면 어떨까”
고령화·소득양극화 따른 소비 위축, 외환위기 때보다 심각
정부 내수활성화 정책 근본부터 잘못…패러다임 전환 필요
2015-12-15 박동준 기자
[매일일보 김경탁·박동준 기자] 국가경제가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은 꾸준히 들려오지만 정작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IMF 때보다 더 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세대간·계층간 소득 양극화가 끝없이 벌어지면서 서민의 지갑이 얼어붙고 있기 때문이다.극도로 얼어붙은 민간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정부는 대대적인 재정·통화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에만 추가경정예산 책정 1회, 부동산 대책 4회, 투자활성화대책 6회에 기준금리도 2차례나 인하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지난 8월 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완화한 것을 예로 들면, 당초 부동산 활성화를 위해 내놓은 이 대책이 도리어 가계부채 증가를 부채질하면서 이자 갚기에 급급해진 가계의 소득을 오히려 위축시키는 역효과가 우려되는 상황이다.더 큰 문제는 상환 능력이 부족한 계층을 상대로 대출을 남발하다보니 대출 증가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동산 규제 완화 이후 매월 6조원 이상씩 폭증한 가계대출의 절반가량이 생활자금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통계가 이런 우려를 뒷받침한다.주택가격 상승에는 한계가 있고, 설령 실제 상승이 이뤄진다고 해도 그것이 소비진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이와 관련 최근 학계에서는 ‘주택가격 상승보다 소득 증대가 소비 진작에 더 효과적’이라는 너무 당연해 보이는 결론이 연구 결과로 나와 눈길을 끈다. ‘내수 활성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실시된 부동산 규제 완화가 근본 방향부터 잘못됐다는 말이다.금융연구원·서울대 금융경제연구원·KCB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주택금융규제 완화, 그 효과는?’ 정책컨퍼런스에서 김영식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최성호 코리아크레딧뷰로(KCB) 연구소 전문연구원의 발표가 대표적이다.이들은 주택담보대출 차주를 대상으로 이들의 소득, 주택가격과 상환원리금이 소비(카드이용액)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소비를 늘리기 위해선 차주의 소득을 늘리는 것이 주택가격을 상승시키는 것보다 약 4.4배 더 강한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특히 분석 결과를 연령대별로 보면 39세 미만은 주택가격 상승에도 오히려 소비를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소형주택에 거주하는 30대의 경우 출산, 교육, 육아 등의 문제로 주택규모를 늘릴 계획이 있을 수 있어 주택가격 상승이 소비보다 저축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2000년대 초반 카드대란을 되돌아보면, ‘빚’이 내수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은 부작용도 부작용이지만 고도성장이 불가능한 시점에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경환경제팀은 빚으로 내수의 수레바퀴를 돌려보겠다는 미련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관련해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최근 조사를 보면, 한국은 지난 10여년 간 전 연령층에서 ‘평균소비성향’(가계의 소비지출을 처분 가능 소득으로 나눠 가계의 ‘씀씀이’를 보여주는 지표)이 감소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가구주 연령이 높아질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경제의 중심에서 생산과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할 젊은 노동자들의 지갑은 점점 더 얇아지고 있고, 그나마 안정적 소득을 거두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평균 연령이 계속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돈을 덜 쓰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수출 중심’인 대한민국의 경제구조에서 내수의 비중을 높여야한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한지는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고 있지만 이를 위해 노동자 권익을 상승시키고, 저소득층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한 정책은 ‘색깔론’의 장벽에 걸려 논의 초반부터 제동을 받고 있다.그러나 인구구조의 변화라는 근본적인 전환기 속에서 양극화라는 악성 종양을 앓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예를 들어, 일부 좌파정치권과 소장학계가 10여년 전부터 연구하고 있는 ‘기본소득’ 제안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수조원을 강바닥에 쏟아 붓거나 누군지 모를 사람의 호주머니에 집어넣기보다 차라리 국민들에게 그냥 나눠주는 것이 낫지 않냐는 것이다.자유시장 시스템이 한계에 부딪혀 국가를 경제활동의 한 주체로 인정하고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도록 했던 ‘케인즈주의’도 처음에는 정책 당국자들을 향해 ‘빨갱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지금의 경제상황에 대해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써보지 않은 ‘백약’(정책)이 너무 많다. 선택 가능한 ‘백약’을 제대로 써보지 않고 그냥 앉아서 골아 죽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