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연한 비밀 ‘낙태’ 공론의 장에 서다

프로라이프 “법이 불합리하다면 바꿔야지, 무시하면되나”

2010-02-11     김인하 기자

[매일일보=김인하 기자] 형법상 범죄로 분류되는 낙태는 대한민국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마음만 먹으면 그 날 바로 병원에 찾아가 시술을 할 수 있거니와 포털사이트에 낙태시술하는 병원을 검색하면 친절한 설명까지 나올 정도다.

이러한 사회 상황에 반해 작년 한 산부인과의사모임(진오비)이 불법낙태근절운동성명서를 내 화제가 된 바 있다. 모임은 당시 성명서를 통해 의사들부터 불법낙태에서 손을 떼자고 설득함과 동시에 복지부와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했다. 계도기간을 가진 뒤 불법낙태시술을 하는 의사에 대해 고발조치 하겠다는 강경한 입장도 밝혔다. 이후 진오비가 불법낙태근절에 대해 활발한 활동을 하기 위해 소속 의사들 중 불법낙태근절운동에 적극적 참여를 보이는 의사들과 프로라이프 의사회를 새로 구성했다.

지난 2월 3일, 프로라이프의사회는 불법 낙태 시술을 실시한 산부인과 세 곳에 대한 고발장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접수했다. 1월1일부터 한 달 간 프로라이프 의사회로 제보된 병·의원 중 사안이 심각하다고 판단된 곳이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고소·고발은 근시안적이고 극단적…분노느껴”
프로라이프 고발 이전까지 불법낙태 적발율 1/34만

이번 고발 건에 대해 프로라이프 의사회 관계자는 “실효성 있는 정부 정책이 나오지 않아 낙태가 줄지 않고 시술 하는 일부 병원으로 몰리는 풍선 효과가 심화되고 있다”며 “정부가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에 강력하게 항의하기 위해 고발 조치에 들어가게 됐다”고 밝혔다.

또 그는 “정부가 계속 책임을 방기하는 한 불법 낙태에 대한 고소 고발은 끊이지 않을 것”이라며 “그동안 하루 1000명 이상의 태아가 불법 낙태 되는 것을 방치해 온 사법 당국이 이제라도 책임을 통감하고 낙태 근절에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고발 조치를 취한 후 복지부는 10일 입장을 발표했다. 2월 안에 ‘불법인공임신중절 예방대책’을 내놓고 ‘불법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한 사회적 협의체’를 다음 달 출범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근 프로라이프의사회의 고발로 낙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을 계기 삼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복지부와 여성부는 기본적으로 각계의 논의 과정을 거쳐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구체적으로 낙태관련 법을 개정하거나 불법낙태시술을 하는 의사들에 대한 제재를 강화할 방침은 현재까지는 없다고 전했다. 복지부가 내놓은 이번 대책이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을 주는 이유이다.

불법낙태시술근절운동 시작 한 뒤, 제보에서 카운셀링까지

프로라이프 의사회 소속인 심상덕 윤리위원장이 있는 서울 동교동의 아이온 산부인과는 산모보다 언론의 드나듬이 더 많다. 지난해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현 프로라이프 의사회, 이하 프로라이프)에서 불법낙태시술근절운동성명서를 발표한 이후로 그렇다. 지난 3일 불법낙태시술을 한 병원의사들을 고발하면서부터 진료보다 인터뷰를 하는 시간이 많다고 진담섞인 농담을 건넬 정도다. 산부인과에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소리는 진료예약 전화가 아닌 이들이 펼치고 있는 운동에 대한 비난이나 불법낙태에 대한 제보가 주를 이룬다. 이들은 왜 정부와 경찰이 해야 하는 일들을 대신 하고 있는 것일까.다음은 프로라이프 의사회 심상덕 윤리위원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작년 성명서 발표 당시, 복지부에서 구체적 답변이 없을 경우 강경 대응하겠다고 했다. 당시 성명발표나 여러가지 활동에도 당국은 반응이 없었다고 하던데.

△언론보도를 통해서 중장기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으나 구체적 사안을 마련한 바는 없다. 복지부가 의지를 갖고 있었다면 앞으로 몇 년 내에 이만큼 해결하겠다는 계획이라도 발표했을 것이지만 이에 대해서 전혀 들은 바가 없다. 정부는 두루뭉술한 계획(청소년에 대한 피임 교육, 미혼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변화)만 늘어놓았다.
그동안 사회가 어떤 일을 했나. 미혼모와 장애인의 출산에 대해 법적인 대책을 마련하길 했나, 가시적으로 보이는 공익 캠페인을 벌이길 했나. 의사들은 자정작용을 하겠다고 나서는데 정부는 대책없이 손을 놓고있는 상황이다.

-작년 불법낙태시술근절 운동 선포식에서 2010년부터는 더욱 강경하게 대응할 방침이라고 했었다. 그때부터 제보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고발대상 선정은 어떤 기준으로 했나?

△산모나 배우자, 내부직원의 제보를 받아 병원 고발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불법낙태
시술을 한 병원을 무조건 고발 대상에 올려놓은 것은 아니다. 불법낙태시술을 전문으로 해왔던 병원과 불법낙태시술의 빈도가 높았던 국공립병원 대해 고발 조치를 감행한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자료도 충분히 있다.

-합법적 낙태시술도 있나

△합법적 낙태는 있다. 그러나 합법적인 낙태 시술이 전체 낙태시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하다. 또한 합법적 낙태시술의 요건에 부합하는 경우라도 임신 24주 후에 이루어지는 낙태시술은 불법이다.
※합법적 낙태란 :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불법 시술이니만큼 수술비도 부르는 게 값이겠다.

△물론이다. 지역에 따라, 그리고 병원에 따라 천지차이지만 7개월이 넘어가면 대개 500~600만원의 수술비를 받는다. 개월 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수술에 대한 위험부담이 높고 까다로운 수술이 되기 때문이다.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질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한산부인과의사회가 성명서를 내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우리의 실제 목적이 불순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사안과는 동떨어진 지적이다. 프로라이프의사회는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낙태를 근절시키자고 말하고 있는데 산부인과의사회는 진짜 목적이 뭔지 밝히라고 한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의사는 법 위에 군림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을 지키기 위해 의사들이 나서자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불법낙태시술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의사들에 대해 토론하고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정부에 대해 이야기해야지 의사들끼리의 집안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라 비난하는가

△가장 많은 것은 병원홍보를 위한 수단으로 낙태근절운동을 이용한다는 비난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 병원은 적자상태다. ‘이 병원이 수술을 잘한다더라’가 아닌 ‘이 병원은 낙태시술을 하지 않는다더라’고 해서 찾아오는 환자들은 없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거냐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 격려해주는 전화는 가끔이지만 항의하는 전화가 더 많은 이런 상황에 무슨 정치판인가. 또한 개인적으로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 종교적 소신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프로라이프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낙태시술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득 본 것은 하나도 없다.

-지난 성명서 발표때도 모두 반신반의 했다. ‘설마 동료 의사를 고발하겠어?’ 그러나 정말 동료의사를 고발했다. 사태를 방치할 경우 복지부장관을 직무유기로 고발하겠다는 이번 말도 그냥 넘길 말은 아닌 듯 한데.

△동료의사들을 고발하는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도 바라고 있다. 마찬가지로 복지부장관을 고발하는 일 역시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정부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을 경우 그러한 조치도 이루어질 수 있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최종적 지향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다른 의사들보다 특별히 양심적이어서 이런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정부가 만든 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의사들이 나서서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불법낙태를 하고 싶으면 정부에 건의하면 된다. 낙태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은 정부에 낙태관련법 허용범위를 늘려달라고 건의하면 되고, 낙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서 낙태를 줄이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임신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해달라고 요구하면 되는 것이다.
하루 천명이 불법낙태를 선택하는 현실에 대해 정부는 외면하고 있고 의사들은 거기에 암묵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의사로서 자제하자는 의견을 내는 것이 우리 프로라이프가 앞으로 해 나갈 일이다.

프로라이프의 움직임에 대해 한국산부인과의사회는 불쾌한 입장을 드러냈다. 작년 불법낙태근절운동성명서 발표 당시에도 프로라이프 의사회 측과 대립각을 세운 바 있는 산부인과의 사회는 9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고소, 고발은 극단적 방법”이라고 지적하며 “근시안적 문제해결방식에 분노를 느낀다”고 밝혔다.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여성계 역시 불법낙태시술의사와 낙태한 여성들을 고발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오히려 음성적인 낙태시술을 부추기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다. 여성계는 미성년자, 미혼모 등 아이를 키우기 힘든 상황의 여성에겐 선택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