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기고] 슬로 라이프의 첫 걸음, 걷기

손대현 국제슬로시티연맹 부회장

2016-05-03     김효봉 기자

[매일일보 김효봉 기자] 걷기예찬자인 프랑스 생물학자 이브 파칼레는 데카르트의 명언을 빌려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남겼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걷는다. 걷는 것은 곧 인간의 본능이다.

옛날엔 하루에 3킬로미터 정도를 걸었지만 요즘엔 한 블록도 걷지 않는다.

차가 등장하면서 더 이상 걷지 않게 되었다.

파리나 런던처럼 한국의 대도시 거리들 역시 보행자로부터 외면당한지 오래되었으며, 도심은 자동차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도시에는 걸을 만한 곳이 별로 없다.

개발이나 뉴타운 건설 등으로 인해 의미 있는 장소가 다 죽어가고 인간의 얼굴과 냄새를 품은 골목의 모습마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사람의 발은 나무의 뿌리와 같다.

걷는 것은 그야말로 발과 땅의 공모를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인 것이다.

사람은 무릇 걷기를 통해 자기 존재에 필요한 영양을 섭취한다.

조선의 명의 허준은 70세 노인의 하체는 40퍼센트가 약하다고 했으며, 약보보다 식보가 낫고 식보보다는 행보가 낫다고 했다.

이 얼마나 시공을 초월하는 말인가.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 뛰어야 하는 다급한 상황이 오게 된다.

단 5분만 제대로 걸어도 기적은 일어난다.

제일 좋아하는 경經이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에 현각 스님은 “순간경! 이 커피향을 맡는 순간, 재즈를 듣는 순간, 걷고 이야기하고 시장에 가는 순간,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친구와 악수를 하면서 감촉을 나누는 순간, 순간, 순간....”이라고 답했다.

틱낫한 스님의 보행명상을 보면 “....평화로운 산책은 없고/평화 곧 산책임을/행복한 산책은 없고/행복 곧 산책임을....걸으면서 순간마다 평화를 만져라/걸으면서 순간마다 행복을 만져라”는 구절이 있다.

보행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도보여행을 하다보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고 자연과 사람을 만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808킬로미터에 달하는 스페인의 순례길, ‘까미노 데 산띠아고’에서는 걷는 것이 곧 기도를 뜻하는 시가 있다. “달리는 사람 걷고/걷는 사람 멈추고/멈춘 사람 앉아보자/먼발치에 핀 꽃/작은 꽃을 자세히 보자/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에 들어온다”라는 작자 미상의 시를 보고 있노라면 걷기가 바로 슬로 라이프의 첫걸음임을 일깨우게 한다.

한국에서는 걷기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운동으로써의 걷기power walking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느린 걸음으로 걷기 자체를 만끽하기보다 정면을 주시하며 빠른 걸음으로 땀 흘리기에 주력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저녁까지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냈으면서 또 다시 바쁜 걸음으로 속도전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걷는 것이다. 하지만 산책散策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산책은 그저 목적을 흩는 무목적이다. 샛길, 돌아가는 길, 한눈팔면서 걷기, 멈추기, 느릿느릿 어슬렁어슬렁 산책하며 취하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산책은 Akademeia라고 하며, 이는 오늘날 학문의 대명사인 academy의 어원이기도 하다. 또한 이탈리아어로 느리게 연주하라는 말인 안단테andante는 걷는 정도의 속도를 의미한다.

슬로 운동으로써 에너지 절약과 지구온난화 방지책으로 무탄소 행위인 시속 5킬로미터의 걷기와 시속 15킬로미터의 자전거 타기를 보편화하여 자동차 때문에 잃어버렸던 몸의 감각들을 되살리고 우리가 ‘두 발 인간’임을 일깨워야 한다.

슬로시티 지역의 일정 구역을 정하여 교통량을 줄이고, 부득이 한 경우에는 벌레가 부딪쳐도 죽지 않는 속도인 16km로 차량속도를 감속하며, 매 주 한 번은 차 없는 날Car-Free day을 정하도록 한다. 자동차가 없어지면 반드시 사람이 모이게 되고 차량 속도가 느려질수록 주민들 간의 사회적 접촉이 많아진다.

빙그레 웃는 섬인 완도,莞島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는 유혹이 넘치고, 청산도의 청산 슬로길에는 느림과 행복의 축제가 넘실댄다.

세계 슬로길 1호인 청산도 슬로길은 그 길이가 42.195킬로미터에 달하며 11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인류는 땅 위에 많은 길들을 내며 흔적을 남겼다. 슬로시티에 걷기에 아름다운 길이 많이 생기고 자동차의 접근을 제한할 때 비로소 슬로시티는 힘을 갖게 된다. 걷기는 생존을 위한 힘줄이다.